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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원법회 | [법문] 여러 형태의 폭력과 불살생...해강스님(6월 첫째주 서원법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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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실상사 작성일11-06-29 22:22 조회4,476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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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월 첫째 일요일 - 서원법회
 
 
    사부대중이 함께하는 이달의 서원   
 
폭력과 불살생
 
 
- 법문 : 해강스님
 
 

한달동안 행복하셨습니까? (네)
그런데 불자들은 삶이 행복할 수 없다니까요.(웃음) 부처님께서 세상은 모두 고통이라 하셨는데… 진실에 눈떠 갈수록 세상의 고통이 더  점점 많이 보여 지는 것이 현실인데, 세상이 행복하다는 것은 그만큼 고통이 눈에 안보였다는 말이지 않겠어요?
 
봄이 가고 벌써 여름인가 봅니다.
세월은 내가 배웅하지 않아도 때가 되면 저절로 떠나고
내가 마중하지 않아도 어느새 성큼 내 곁에 와있습니다.
오월이 가고 벌써 6월입니다. 지난 한 달 동안 여러분의 삶은 얼마나 후회 없는 삶이셨습니까.
부처님의 삶과 얼마나 가까워 지셨는지도 궁금합니다.
 
지난 서원법회 참석하시고서 여러분 개개인 각각마다 서원을 세우셨을 겁니다.
이제 새로운 달을 시작하는 머리에 서서 지난 한 달을 되돌아보면서 반성하고 충분하지 못했던 것에 대해서 참회하고, 다시 새로운 서원을 세우는 시간을 가져야겠습니다.
이렇게 우리가 서원을 세우고 반성해서 참회하고, 부족함을 메우고자 다시금 각오를 다지고 또다시 서원을 세우고… 이런 반복적 수행을 통해서  우리의 삶은 자신도 모르게 조금씩 부처다움, 참사람다움, 그래서 진정 행복한 인생으로 발걸음이 옮겨가는 것입니다.
 
늘 제가 말씀 드리지만 어느 날 눈떠보니 벼락부자가 되듯이, 또는 로또 당첨되듯이 부처 되는 게 아니라는 것입니다. 행복이 어느 날 갑자기 굴러 떨어지는 게 아니라는 겁니다. 조금씩 변화해 간다는 것이고 노력한 만큼 얻어지는 것입니다.
 
지난달 우리가 공동으로 부처님께 함께 절을 하면서 세웠던 서원이 무엇이었지요?
불살생의 정신으로 육식을 줄여가고 채식을 늘려가며 더 나아가 채식주의자가 되자 라는 공동 서원을 세웠습니다. 얼마나 잘 지키셨나요?
 
채식은 불살생의 정신을 실천하는 자비 보살의 길입니다. 불살생은 불자 계율이면서 최고의 덕목입니다. 또한 수행입니다. 이는 단순히 계율과 도덕에서만 멈추는 것이 아니고 그 자체가 곧 부처가 되기 위한 부처의 수행법, 부처의 길이라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지난 시간에 이어 불살생에 대해 좀 더 이야기 해보겠습니다.
저는 불살생이라 말보다는 비폭력, 무폭력, 즉 살생이라는 말보다는 폭력이라는 표현을 쓰는 게 부처님 가르침의 취지에 더 잘 들어 맞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불살생의 원어가 인도말로 ‘아힘사’라고 말씀드렸지요. 아힘사가 가진 뜻은 산목숨을 죽이지 말라는 뜻뿐만 아니라 어떤 형태든지 간에 모든 폭력을 버리는 것을 말합니다. 그러므로 비폭력, 무폭력이라는 말이 보다 더 포괄적인 단어가 아닌가 싶습니다. 살생, 이 죽임이라고 하는 것은 폭력의 극단적 행위입니다.
 
우리는 살면서 때로는 원하지 않더라도 불행한, 또는 위험한 상황, 불쾌하거나 아름답지 못한 상황을 맞닥뜨리게 됩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그런 상황을 맞닥뜨리고 나서 자신도 몰랐던 자기 안의 폭력성을 발견하고서 스스로도 놀란다고 합니다.
 
어떤 이는 그것이 인간의 본능이라고도 합니다만, 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어떤 형태로든 어떠한 목적에 의해서건 간에 폭력의 끝은 불행이라는 것, 그리고 고통이 따른다는 것, 또한 어떤 문제이든 폭력으로는 해결할 수 없다는 것을 부처님의 가르침을 빌리지 않고라도 인생을 살아가면서 경험으로 충분히 알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곧잘 폭력을 통해서 욕망을 만족시키려 하고 문제를 해결하려고 합니다. 우리가 경험해 봤듯 폭력을 통해 만족된 욕망은 결코 진정한 행복이 아닙니다. 그 뒤에는 더 큰 불행이 따라옵니다. 폭력을 통한 문제해결은 일순간  해결된 듯 보이나 우리가 모르는 한 구석에 웅크리고 있다가 보다 더 큰 문제로 덮쳐 옵니다.
 
이것은 우리가 잘 아는 사실이고 종종 경험하지요. 그런데도 우리는 너무도 쉽게 폭력에 휩싸이고 빠지며 폭력을 쓰게 되고 더 나아가 자신의 폭력이나 사회의 폭력을 정당화 하려 하기까지 할까요? 또 폭력이란 것은 어디서, 어떻게, 왜 생기는 것일까요?
 
폭력의 바로 밑에는 강렬한 탐욕이나 욕망이나 성냄, 분노심이 자리하고 있습니다. 대부분 성냄, 분노를 바탕으로 하지요. 그런 분노가 일어난 사람의 마음상태는 들떠있고 어지러워져 있고 흔들리고 안정되어 있지 못합니다.
 
우리가 어떤 상황에서도 마음의 고요를 지켜낼 수 있고 마음을 안정시킬 수 있다면 절대로 화내지 않습니다. 분노하지 않습니다. 왜, 생겨날 조건이 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수행을 통해 어떤 상황에서도 마음의 안정, 고요를 깨뜨리지 않는 힘을 길러야 합니다. 이것이 진정한 수행입니다.
 
그렇다면 이런 마음의 안정을 깨뜨리는 것은 무엇일까요? 무엇이 내 마음의 고요를 잡아 뒤흔들어 들뜨고 어지럽게 만들었을까. 들여다보면 그 속에는 대체로 ‘욕심’이 있습니다. 자만심, 이기심, 시기심이 있습니다. 한마디로 자아관념, 자의식(ego)입니다.

자의식은 어떻게 생겨날까요? 인간의 자의식, ‘나’라는 생각은 어디에서 생겨날까요?
부처님이 말씀하셨습니다. 내 눈 앞에 펼쳐진 이 세상, 존재의 실상을 있는 그대로 보지 못하기 때문에, 참모습을 보지 못하기 때문에, 그런 무지로부터 ‘나’라는 생각이 일어나고 ‘나’라는 것과 더불어 ‘내것’이라는 생각이 일어나며, ‘나다’, ‘내것이다’라는 생각에서 ‘너다’, ‘네것이다’라는 생각이 생겨나고‘ 이런 분별에서 바로 우리가 겪게 되는 모든 갈등과 폭력과 고통이 생겨나는 것이라고.
 
결국 폭력의 가장 큰 원인은 무지무명(無知無明), 즉 어리석음입니다. 그 사이에는 중첩된 여러 가지 마음 상태들이 있습니다만, 가장 근본원인은 ‘무지무명’이라고 이야기하겠습니다. 이렇게 무지무명을 바탕으로 생겨난 폭력이 어떻게 표출됩니까? 몸으로 표출되고 마음으로 표출되고 말로 나타나지요. 욕하고 겁주고 소리 지르고 공갈 협박하고 때리고 부수고 죽이고 저주하는 것, 이것이 모두 삼업으로 표출되는 것이요, 이것이 폭력이지요.
 
***
 
오늘 이 시간에는 우리 모두가 인정한 이런 식의 폭력이 아닌, 또 다른 관점의 폭력을 말씀 드리고자 합니다. 가령 말로 하는 폭력은 거친 말로써 욕하고 겁박(劫縛)하는 것들인데, 말 없는 침묵 역시도 폭력이 되기도 합니다. 말없는 침묵이 폭력을 만들어내는 상황도 여러 가지입니다. 그 가운데 제가 오늘 말씀 드리고 싶은 것은, 폭력의 상황, 억압의 상황, 고통의 상황에 침묵하는 것도 폭력이라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내 눈앞에 벌어지는 세상의 억압이나 폭력, 부당한 현상, 고통스런 현상에 대해 입을 닫는 것, 그런 침묵 역시도 폭력이라는 것입니다. 구체적으로 예를 들면, 전쟁, 기아, 소외, 억압, 환경파괴, 동물학대 등 이러한 폭력적 상황에 대해서 침묵하는 것은 입으로 짓는 폭력의 또 다른 악업입니다. 그것을 외면하고 회피하는 것은 몸으로 짓는 또 다른 형태의 폭력악업입니다. 그것에 무관심 한 것, 무지한 것 역시도 마음으로 짓는 또 다른 형태의 폭력악업입니다.
 
가끔 심심찮게 뉴스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버스나 지하철 같은 공공장소에서 버스 기사 등이 폭력을 당하고 있을 때 주변의 사람들 누구도 도와주지 않았다, 전부 침묵하고 무관심하게 외면했다는 겁니다. 자, 그랬을 때 폭력을 행한 가해자만이 폭력자일까요? 우리가 폭력을 동조하고 조장한 것이며 그 자체가 폭력이라는 것입니다. 만약 우리가 그러한 폭력적 상황에서 침묵하지 않고 외면하지 않고 무관심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그 상황을 막아낼 수 있고 최소화할 수 있으며 더 나아가 소멸시킬 수 있습니다.
 
도둑이 담을 넘을 때 CCTV가 있는 집과 없는 집이 있다면 어떤 집을 선택할까요?
당연히 없는 집을 선택하겠지요. 누군가 지켜보기 때문에 부담스럽고 함부로 할 수가 없겠지요. 마찬가지로 누군가가 관심을 갖고 있다면, 외면하지 않고 지켜보고 있다면, 침묵하지 않고 항거하며 말을 던지게 되면, 어떤 상황이든 함부로 생겨날 수 없고 함부로 할 수 없습니다. 생겨났더라도 더 이상 커지지 못할 것입니다.
 
‘침묵하고 외면하고 회피하고 무관심 한 것 역시 또 다른 형태의 폭력입니다.’ 오늘 저는 이것을 여러분께 말씀 드리고 싶습니다. ‘또한 폭력적 상황에 무지한 것 역시도 폭력입니다.’ 앞에서 폭력의 가장 근본 원인을 무지 무명이라 말씀드렸지요? TV나 여행을 통해 보신 분들이 있으실 겁니다. 지구촌에는 무지를 바탕으로 생겨난 미의 추구 현상들 가운데 재미있는 것들이 많습니다.
동남아에는 목이 긴 여자를 최고 미인으로 여기는 소수부족이 있는데, 어릴 때부터 목을 늘이기 위해 쇠고리를 하나씩 하나씩 수를 늘려가며 찹니다. 그 결과 성인이 되었을 때 일반 사람들보다 목의 길이가 몇 배나 길어지지요. 그 과정, 그렇게 살아가야 하는 현실이 얼마나 고통스럽겠습니까? 그런데 그것이 문화요 전통이라는 이름으로 행해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아프리카에는 귀나 입술 쪽에 원반 나무를 깎아서 길게 쭉 늘이지 않습니까. 그 역시도 아름다움 때문에 그렇습니다. 다른 나라의 사람들이 그런 것을 보면 ‘미개한 문명이다’, ‘무식하다’고 이야기할 수도 있겠죠. 자, 이런 것들과 시체 껍데기를 뒤집어 쓴 것과 같은 모피를 입는 것하고 무엇이 다릅니까? 역시 무지를 바탕으로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미개한 문명이요, 폭력 행위입니다.
 
미국 가수 중에 화제를 몰고 다니는 ‘레이디 가가’라는 여가수가 있습니다. 곧잘 파격적 의상을 입고 나와 시선을 끌던데, 언젠가 생고기를 저며 엮어서 그것을 걸치고 나온 것을 뉴스에서 본 적이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그것을 보고 정신병적 증세라고들 이야기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잘 따져보면, 생고기를 입는 것이나 동물 껍데기를 벗겨서 입는 모피나 무엇이 다를까요?
 
우리나라 사람들은 잠재의식 속에 고기를 먹어야 건강하고 힘을 쓸 수 있다는 생각이 박혀있는 것 같습니다. 그럼 정말로 고기를 먹어야 그렇게 될 수 있는 걸까요? 힘을 쓰는 걸로 따지면 육식 동물보다 초식동물들이 힘이 더 셉니다. 달리기를 해도 지구력이 육식 동물보다 더 낫습니다.
오늘날 현대인이 병에 걸렸을 때, 심지어 의사들이 가망이 없다며 손을 놔버린 환자들도 고기를 끊고 채식을 하여 병을 고치지 않습니까. 고기를 먹어야 건강해진다는 것이 사실이라면 아플수록 채식을 끊고 고기를 먹어야 하지요. 그래야 힘도 나고 건강해질 것 아니겠습니까. 그러니 고기를 먹어야 건강하고 힘을 쓸 수 있다는 생각도 무지무명을 바탕으로 한 착각입니다.
 
이 이야기는 논란의 소지도 있고 문제가 될 수도 있는데, 제 개인 소견으로는 애완동물을 기르는 것도 또 다른 관점에서의 폭력이라고 생각합니다.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포장하여 동물의 본성을 억압하고 자기 욕망을 충족시키는 것이 애완동물입니다. 자기가 원하는 것을 요구하고 강요하고 그것을 사랑이라고 착각하는 것이 애완동물 기르기입니다.
 
입장을 바꿔 생각해 봅시다. 강아지 치와와가 나를 사랑해서 기르면서 목줄을 감아쥐고 화려한 옷을 입혔다가 벗겼다가 장갑이나 모자를 신겼다가 벗겼다가 한다고 생각해보세요. 어떨 것 같으세요? 애완동물을 기른다는 것은 엄밀히 따지면 자기 욕망을 충족시키기 위해 사랑이라는 착각으로 임의대로 다른 생명의 본성을 억압하고 조절하는 또 다른 폭력행위입니다.
 
우리나라도 애완동물을 기르는 사람들이 너무도 많은데 제 말에 들고 일어날까봐 방패막이를 하기 위해 한 가지 첨가한다면, 애완동물을 기르는 것 모두가 다 그렇다고는 할 수 없을 것입니다. 가령 우리 절 꽃님이 크는 것 보세요. 왕입니다. 주인이 따로 없어요. 그때그때 자기 맘에 드는 사람 따라 다니지요. 사실 꽃님이가 어릴 때부터 제가 키웠는데 제가 불러도 지가 싫으면 안 옵니다. 부르면 쳐다봤다가 고개를 돌립니다. 그래도 계속 부르면 가버립니다. 그러다 맛있는 걸 들고 차에서 내리면 쏜살같이 달려옵니다. 이렇게 자유롭게 키우는 경우도 있으니 전부가 폭력의 행위라고 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오늘은 모피, 육식, 애완동물 기르기와 행위들을 통해 우리가 알게 모르게 저지르고 있는 폭력에 대해 살펴봤는데, 사실 우리가 너무 무관심하고 무지해서 우리가 모르는 사이 실생활에서 얼마나 폭력적인 행위를 하고 있는지, 그것을 얼마나 즐기고 있는지, 또 얼마나 폭력을 조장하는 삶을 살고 있는지 자신을 항상 점검할 필요가 있습니다. 자기 스스로 미처 느끼지 못하기도 하지만 무지함으로 인해서  벌어지는 나의 폭력, 내 주변의 폭력들을 되돌아보는 이야기들을 다음 시간에 해봤으면 싶습니다.
 
오늘 제가 여러분들께 드리고 싶은 말씀은, 내 안에서 일어나는 폭력의 마음이든, 타인에 의해 벌어지는 폭력이든, 세상에서 벌어지는 폭력의 현상, 억압의 현상, 고통의 현상, 또는 전쟁, 기아, 억압, 소외, 환경파괴, 동물학대 등의 폭력 현상에 대해서 우리가 침묵하고 외면하고 회피하고 무관심한 것, 심지어 무지한 것조차도 또 다른 형태의 폭력임을 깨닫고, 우리는 그러한 폭력에서조차도 벗어나려는 노력을 하겠다는 자각과 각오와 약속을 다지고, 이것이 곧 자비를 실천하는 보살의 길임을 명심하고 노력하며, 그 길을 가겠다고 맹세하고 부처님 전에 서원하기를 바랍니다. 이것을 6월에 세우는 공동의 서원으로 제안합니다.
 
보통 보살에 대해 이렇게 말합니다. 중생구제를 위해서 자기의 성불을 뒤로 미루고서도 중생을 위해 헌신 봉사하는 수행자라고 말입니다. 그런데 그렇지 않습니다. 보살의 길 자체가 부처 되는 것이고 부처의 길입니다. 결코 자신의 성불을 미루는 게 아닙니다.
 
오늘 이 자리에 모이신 여러 우바이 우바새 보살들을 불살생의 정신을 실천하겠다는 서원, 보다 더 적극적으로는 자신이 실천하는 것뿐만 아니라 폭력적 현상에 대해 침묵과 외면과 무관심의 또 다른 폭력조차도 버리고자 노력하겠다는 서원을 부처님께 세웠으면 합니다. 그것을 위해서 노력하는 것이 바로 보살의 길이요 삶이며 부처되는 길이요 부처의 삶입니다.
 
오늘 제가 제안한 서원에 대해 공감하고 동의하고 노력하겠다는 각오를 다지신 분들은 부처님 전에 삼배하는 것으로서 서원을 약속하십시오. 그 서원과 함께 오늘 법회를 마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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