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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원법회 | [법문] 불살생과 비폭력의 생활_ 해강스님(7월첫주 서원법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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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실상사 작성일11-10-11 19:08 조회4,089회 댓글1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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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월 첫째주 서원법회
 
불살생과 비폭력의 삶
 
- 해강스님 (실상사 주지) 
 
출가자든 재가자든 불제자의 궁극적 목적은 부처가 되는 것입니다.
부처님께서 팔만사천 가르침을 펴신 이유도
그 가르침을 듣는 모든 이로 하여금  부처가 되게 하리라는 원을 세우시고
그런 희망으로 가르침을 펴신 것입니다.

부처라는 것, 부처가 되어 부처답게 산다는 것은  진정으로 행복하게 삶을 살아가는 것을 말합니다.
그래서 그런 행복을 만들어 가는 인간다운 삶을 살아보겠다 하는 것이 부처되고자 하는 발원이고
행복한 삶, 인간다운 삶을 사는 사람을 부처라고 합니다.
우리가 절에 다니는 궁극적 목적은 바로 부처다운 삶을 사는 사람이 되겠다는 것입니다. 
그러한 목적을 이루기 위해서 서원을 세우는 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우리가 부처되기 위한 수단과 방법과 노력을 무엇이라 말합니까? 수행이라고 하지요?
수행을 통해서 부처가 된다고 하는데 수행을 정리하면 세 가지로 말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서원과 참회와 각성입니다.
수행에서 서원을 세운다는 것은 부처되는 길을 여는 것입니다.
참회는 부처되는 길을 닦는 것입니다.
각성, 깨어있음이란 부처의 길을 가는 것입니다.
이렇듯 길을 열고 길을 닦고 길을 가는 자만이 비로소 그 길의 최종 목적지에 도달할 수 있습니다.
서원을 세우지 않는 자를 경전에서는 어리석은 자, 바보라고 이야기 하는데,
바보를 비유한 유명한 일화가 있습니다.
어떤 이가 멋진 삼층집을 짓자 나 역시 그 집을 지으려 하는데 시간이 너무 오래 걸릴 것 같습니다.
성질 급한 사나이는 일층도 이층도 필요 없으니 삼층만 지으라고 말했다고 합니다.
어떻게 1층이 없고 2층이 없이 3층을 지을 수 있겠습니까.
서원을 빠뜨리고서 부처가 되겠다는 것은 1층을 짓지 않고 2,3층을 지으려하는 어리석은 자와 같습니다.
 
부처가 되고자 하는 불제자라면 반드시 서원을 세워야 합니다.
이 서원을 세움에 단기, 중기, 장기서원으로 나누어 세울 수 있습니다.
장기서원 이란  궁극적인 목표, 최종 목표를 세우는 것이지요. 부처가 되는 것입니다.
자신의 인생관, 가치관을 세우는 것이라고도 하겠습니다.
불제자가 가져야 할 최고의 가치있는 인생관이란 부처되는 것입니다.
고로 부처답게 살겠다는 인생관을 세워야 합니다.
 
중기의 서원이라 한다면 한 달이나 일 년처럼 일정한 기간을 갖고
그 기간 동안 노력해서 이룰 수 있는 내용들로 구성된 서원들을 세우셔야 합니다.
 
단기 서원이라 한다면 짧게는 순간순간이 되겠습니다만,
하루, 아무리 길어도 1주일 정도로 기간을 정해 서원을 세우는 것이지요.
 
단기나 중기의 서원은 자신의 삶을 변화시킬 수 있는 구체적 내용으로서 서원을 가져야 합니다. 오늘 하루를 시작하면서 오늘은, 1주일을 시작하면서 이번 주는, 한달을 시작하면서 이번 한달은, 한해를 시작하면서 이번 한해는,  내가 이러 이러한 목표를 가지고 삶을 살아가리라, 그래서 이러 이렇게 내 삶을 만들어 가리라, 이런 서원을 세워야 합니다.

서원을 세우고서 실천하는 것, 실천하고자 노력하는 것 이것이 바로 수행입니다.
서원을 세우지 않으면 지향점이 없게 되고 지향점이 없으면 물러섬 없는, 끊임없는 노력을 하기가 어렵습니다.
 
아침마다 오늘 난 이러이러하게 살아서 내 삶을 긍정적으로 변화시키리라, 이것 한 가지만 하시면 됩니다. 매일매일 하기 힘들면  1주일에 한번이라도 하셔야 되요. 단기 서원 말고도 한 달을 시작하면서 1년을 시작하면서 이런 목적을 가지고 내 삶을 변화시키고 가꾸어 가리라는 목표,  서원을 세우는 것입니다.
 
그렇게 서원을 세우는 것을 원력이라 하고 발원이라 하며, 그 발원을 부처님과 스스로에게 약속하는 것을 서원이라고 합니다. 여러분이 스스로 원력, 발원을 세우셨으면 절에 오셔서 부처님께 기도하면서 약속하는 의식을 갖는 것이 서원입니다. 이런 것을 통해서 여러분의 삶은 조금씩 조금씩 긍정적으로, 행복한 쪽으로 변화되어 갈 것입니다.
 
이러한 의미로 올해 들어 서원 법회를 하면서 여러분들 개인의 서원을 세우시라 말씀드렸고
개개인의 서원을 돕는 의미에서 실상사 사부대중 모두가 함께 세우는 서원에 대해서 말씀드리고 있습니다.

첫번째로 불살생 비폭력의 삶을 살아가자는 서원을 세우자고 말씀드리면서 초기에는 육식을 하지 않고 채식을 하는 삶으로 자신의 삶을 바꿔가자는 서원을 세웠고, 이어서 모피나 가죽 제품을 사용하지 않는 삶을 살아가자고 제안 드렸었고 이어 애완동물에 대해서 말씀 드렸습니다.
 
우리나라에도 애완 동물을 키우는 사람들이 매우 많습니다.
애완동물이라는 말이 무슨 뜻입니까.
애(愛)는 내가 아끼고 사랑하고 좋아한다는 뜻이고 완(玩:희롱할 완)은 한자로 장난감이란 뜻입니다. 놀잇거리 말입니다.
애완견이라 하면 ‘내가 사랑하고 좋아하고 아끼는 놀이감으로서의 개’ 이런 말이지요. 결국 장난감입니다.
실제로 오늘날 사람들이 키우는 애완견 가운데 상당수가 자연적으로 생겨나고 번식한 개가 아닌
사람들의 놀잇감으로서 일부러 만들어 낸, 애완용으로 만들어 낸 완구입니다.
사람들이 좋아할 만한 것으로 유전자 조작이나 교배 조작으로서 만들어 낸 것입니다.
 
제가 몇년 전에 컵 강아지(티컵:teacup)라는 강아지를 보고서 놀라웠고 가슴이 아팠는데 이게 자연적으로 생긴 것 입니까.
아니예요. 만들어 낸 것입니다. 그래서 불티나게 팔린 것 아닙니까. 그게 장난감이 아니고 무엇 입니까. 생명을 가지고 노는 것입니다.
 
인간의 놀이는 놀만큼 놀고 나서 싫증이 나면 점점 폭력적으로 변해갑니다.
마지막 폭력적이고 극단적인 놀이가 무엇인가 하면 생명을 가지고 노는 것입니다.
생명을 갖고 노는 것이 인간에게서 드러난 마지막 놀이폭력입니다.
인간이 아닌 다른 생명을 가지고 놀다가 거기에서도 재미가 없고 싫증을 느끼게 되면
인간 자체, 인간의 생명을 갖고 놀게 됩니다.
아마 로마 시대의 검투사 이야기를 다들 들어보셨을 것입니다.
그것은 인간 생명을 가지고 노는 놀이였습니다.
검투사들이 서로 싸우고 찔러 죽여 피가 난무할 때 사람들은 환호하고 좋아했습니다.
바로 이렇게 변해갑니다.
 
냉정하게 이야기해 애완동물이라는 것은 인간의 유희를 위해, 놀이를 위해 생겨난 방식입니다.
생존을 위해, 먹고 살기 위해 만들어 낸 것이 아닙니다.
그런 점에서 불자들은 애완동물을 기르는 것에 대해 다시한번, 냉정하게 또 객관적으로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물론 애완동물들이 인간의 삶에 긍정적 영향을 주는 부분도 없지 않아 있습니다. 
꼭 필요하신 분들도 있습니다. 그런데 그런 분들은 극히 소수입니다. 극히 예외적인 경우이지요. 
그런 경우에는 애완동물, 장난감이 아니지요.
이런 경우를 제외하고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신의 위안이나 놀이를 위해 키우는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애완동물을 키우는 것은 일종의 생명존재에 대한 폭력이고 억압입니다.
불제자들은 이런 관점에서 생각해 봐야 하며 그런 인식을 얻는다면 불제자들은 애완동물을 키워서는 안됩니다.
부득이하게 키워야 하는 상황이 생긴다면
기르더라도 대등한 생명체라는 생명의 격을 부여해서 바라보셔야 하고
그 동물의 입장에서도 생각해보는, 그러한 관점을 놓쳐서는 안됩니다.
최대한의 배려와 최대한의 애정을 가지고 돌보아야 합니다.
만약 그럴만한 준비가 안되었거나 그런 환경 여건이 안된다면 길러서는 안됩니다.
 
애완동물을 기르는 행위가 어떤 결과는 낳느냐 하면 
애완동물을 사랑한다고 생각하면서 행하는 행위가 원인이 되어 나중에 내 삶에 나쁜 결과를 불러옵니다. 
왜냐하면 나는 사랑한다고 하는 행동이지만,
예를 들어 앉아 일어서 하는 훈련을 시키면서 잘하면 예뻐하고 먹을 것을 주고 자꾸 시키게 되지요.
그렇게 사랑하며 쓰다듬어 주면서 그것이 어떠한 악업인지 어떠한 결과를 초래할 것인지에 대해 별 생각이 없습니다.
그런데 인과는 매우 엄연합니다. 인과는 자연의 법칙입니다.
그래서 사랑의 마음은 사랑의 마음이고 행위는 행위입니다.
우리는 의도가 선하면 모든 행위가 다 합리화된다고 생각하는데 그렇지 않습니다.
선한 맘으로 하는 행위에도 선한 마음의 선은 선이고 행위 자체가 가지는 자연적 인과는 인과대로 흘러갑니다.
 
좋은 예로서 이야기되는 게 있는데 침술사의 침놓는 얘기지요.
다리를 삐거나 어깨가 아프면 한의원에 가서 침을 맞습니다.
한의사가 침을 놓을 적에 그 마음은 어떻습니까.
어디에 어떻게 침을 놓아야 이 사람이 빨리 나을 수 있을까 하는 마음으로 침을 놓습니다.
아주 선한 마음이지요. 자비스러운 마음입니다.
그런데 그런 마음으로 침을 놓지만 찌르면서 상대방을 아프게 합니다.
그런 행위의 결과로 상대가 병을 낫게 됩니다.
의도가 선하면 어떤 행위라도 무조건 나에게 좋은 결과만 가져올 것이라고 생각하는데,
과연 그럴까요. 천만에, 그렇지 않습니다.
 
선이나 악을 떠나 인과는 냉정하게 전개 됩니다.
어서 낫길 바라는 선한 마음이 원인이 되어 그에 상응하는 결과를 불러옵니다.
그러나 침을 놓으면서 상대를 아프게 하는 행위는 그에 상응하는 결과를 가지고 옵니다.
이런 식으로 말 한마디, 행동 하나, 마음 쓰는 것마다
그것이 원인이 되어 그에 상응하는 결과가 이루어지는 것이 엄연한 자연의 인과 법칙입니다.
 
애완동물을 기르면서 행하게 되는 많은 행위들은
그것이 선이냐 악이냐 사랑의 마음이냐 아니면 억압의 마음이냐를 떠나
그에 상응하는 결과를 가져온다는 것입니다.
한번 냉정하게 자신의 행위를 객관화 시켜서 바라보십시오.
한 생명체가 다른 생명체를 그렇게 다루었을 때 그것이 원인이 되어 가져올 결과가 어떤 것일지를요.
생각을 해본다면 우리가 애완동물을 기르면서 짓는 업이 얼마나 많은 과보를 가져올지,
다시 말해 미래의 나에게 가져올 결과가 어떠한 성질의 어떠한 내용일지 조금은 알아차릴 수 있습니다.
애완동물을 기르는 것뿐만 아니라 우리가 놀이를 통해 유희를 통해
우리가 의식하지 못하면서 또 관심 갖지 아니하면서 불러오는 폭력적 행위들이 우리 삶에는 상당히 많습니다.
그 중 한 가지만 말씀드린다면 우리나라에도 있습니다만 동남아 여행을 가면 빼놓지 않고 가는 코스가 있지요.
코끼리 쇼, 뱀 쇼, 악어 쇼 원숭이 쇼, 수족관에 가면 돌고래 물개 범고래들이 공놀이 하는 등의 쇼를 하지 않습니까.
그 쇼의 이면에 얼마나 많은 폭력이 벌어지고 있는지 아십니까.
조금만 관심을 갖고 살펴보면 쉽게 알 수 있습니다.
돌고래나 범고래 같은 경우 자연에서의 활동 범위는 수천 킬로에 이릅니다.
수천 킬로에 이르는 활동범위를 가진 생명체들이 그 조그마한 수족관 안에서 갇혀 지낸다고 생각해 보세요. 
여러분들을 반 평짜리 방에다 몰아넣고 꼼짝 못하게 하는것과 같습니다.
그리고선 필요할 때만 꺼내다가 꺼낸 사람이 원하는 것만 해야 된다고 생각해 보세요.
 
전해 들은 이야기인데요 
그런 환경이 주는 스트레스, 그리고 조련과정, 쇼를 행하는 과정에서
돌고래나 범고래나 불개들이 겪는 스트레스가 어마어마하다고 합니다.
왜냐하면 그 동물들은 상당히 지능이 높고 인간 이상으로 감성적인 생각을 가지고 있답니다.
그래서 위장약을 달고 산답니다. 항생제 같은걸 달고 살다 그 약이 없으면 죽게 된답니다.
매일 위장약과 항생제를 한 주먹씩 투여한다고 합니다.
그것을 먹지 않으면 스트레스를 견딜 수 없다는 것이지요.
 
스트레스를 받는다는 것이 바로 그만큼 억압 받는다는 것입니다.
누구로부터? 키우는 사람들, 조련사, 구경꾼들로부터입니다.
그렇다면 조련사는 왜 그 일을 할까? 보여 주려고.
왜? 돈내고 보는 사람들이 있기 때문에.
 
코끼리가 쇼를 보여주는 그 한 순간을 위해 겪는 고통은 이루 말할 수가 없습니다.
여러분들이 조금만 관심을 가지신다면 그런 동물들이 어떻게 사육되고 조련되는지 쉽게 자료들을 찾아보실 수 있으실 것입니다. 코끼리만 하더라도 어렸을 때부터 날카로운 쇠꼬챙이에 수없이 머리를 찔리면서 훈련을 받습니다. 매를 맞고 먹을 것으로 조절 당하면서 조련을 받습니다.
 
원숭이의 경우 조그만 철창 속에 가두어 놨다가 수없는 매질과 먹이 조절로 훈련받습니다. 특히 새끼가 있는 어미 원숭이는 새끼에 대한 보호 본능 때문에 훈련을 거부하고 배웠던 재주도 잘 하지 않으려 한답니다. 이럴 땐 젖먹이 새끼를 강제로 떼어내는 거지요. 원숭이는 그 어떤 동물보다 모성애가 강하다고 합니다.
 
옛 고사에 보면 어떤 이가 장강 가에서 원숭이새끼 한 마리를 잡아 배를 타고 장강을 흘러가는데 원숭이 어미가 계속 울면서 쫓아오더랍니다. 부두에 닿자 어미가 배 위로 뛰어들어 와서는 새끼를 안고 바로 죽었답니다. 배를 갈라보니 속이 새카맣게 탔더랍니다.
이런 모성애 강한 원숭이에게 새끼를 떼어놓고 젖도 못 먹이게 하고 매질을 해가며 훈련을 시킵니다. 그리고 재주를 부리게 합니다. 그러한 이면의 과정들을 통해서 짧은 시간 관광객들의 재미를 보장하는 것입니다.  만약 정말 우리가 자비심을 가진 사람이라면 그 이면을 알고 그들의 재롱을 본다면 더 이상 그것은 재롱이 아닙니다. 고통에 겨운 그들의 처절한 몸부림을 보고 즐거워한다면 그것은 무자비한 짓입니다. 잔인한 짓입니다.
 
이런 식으로 우리의 삶 속에서 우리가 조금만 관심을 갖고 들여다 보면 알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무덤덤하고 무관심하게 행함으로서 행해지는 폭력이 너무도 많습니다.
가령 동물 쇼를 보면서 행해지는 폭력은 쇼를 봄으로서 동물들이 그런 희생을 강요당하고 그런 폭력 속에 살아가게 하는 원인 제공을 하는 것 뿐만 아니라 그런 것을 즐기는 것 자체가 또 다른 폭력입니다. 자신의 마음속에, 인류 사회 문화 속에 폭력을 조장하는 행위인 것입니다.
 
그러한 행위들이 역시 또 폭력의 결과를 끌어오는 것입니다.
계속 순환 되어지는 폭력을 만드는 행위가 되는 것입니다.
결코 선업일 수가 없는 것입니다. 
좋은 과보를 불러올 수 없는 놀이요, 행위요, 마음 씀 입니다.
 
그동안 불살생을 이야기 하면서 동물에게 행해지는 인간의 폭력문제를 육식이라는 것만을 통해 말씀드려 왔습니다만, 사실 그외에도 우리 삶 속에서 너무 무관심하고 가볍게 대해짐으로서 행해지는 폭력적 행위와 삶들이 너무도 많이 있다는 점을 돌아 봤으면 싶고 그동안 우리가 이야기 해왔던 것을 정리했으면 합니다.
 
진정 불살생을 행하고 비폭력을 행하는 것은, 부처되는 중요한 수행이면서 부처로서 사는 삶의 방식입니다. 우리가 부처가 되어 부처로서 삶을 산다는 것은, 바로 내 삶에 비폭력적 요소를 늘려가고 폭력적 요소를 줄여가는 것입니다. 내 삶이 비폭력적 삶으로서 충만할때, 그때 나는 이미 부처인 것입니다. 나는 부처답게 사는 것입니다.
 
그런 비폭력적 삶을 생활화하기 위해서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고기 먹는 것을 즐기지 아니하고 육식을 줄여가는 것.
채식을 늘려 가는 것. 그래서 결국 채식주의자가 되는 것.
모피라든지 가죽 제품을 생활 속에서 사용하지 않는 것.
애완 동물들을 폭력적으로 자신의 만족을 위해서 기르지 않는 것. 즉 애완용으로 놀잇감으로 기르지 않는 것.
폭력적으로 길러지고 조련 되어 지고 다루어지는 생명들의 처절한 몸부림이고 발악인
동물들의 쇼를 가서 보고 즐기지 않는 것 입니다.
 
어찌 보면 이런 작은 실천이 곧 내 삶을 그리고 우리의 삶을 비폭력 불살생으로 바꿔가는 것이고, 우리의 삶이 불살생 비폭력으로 바뀌어 갈 때 그때가 부처다운 삶을 사는 것이고 그러한 사람들이 모여 사는 곳이 바로 곧 부처의 세상이고 극락정토 입니다. 부처의 세상이 따로 있고 불국토가 따로 있고 극락정토가 따로 있는 게 아닙니다.
 
저는 불살생을 이야기하는 마지막 시간에 다시 한번 여러분에게 제안을 드립니다.
불제자가 할 수 있는 작은 실천,  비폭력과 평화를 사랑하는 사람들이 할 수 있는 작은 실천,
그러나 그것이 불러오는 큰 행복 말입니다.

채식하기. 육식을 즐기지 않기. 채식을 생활화하기. 그렇게 되도록 노력하겠습니다.
모피나 가죽제품을 내 삶에서 사용하지 않겠습니다.
내 즐거움을 위해서 동물들을 기르거나 데리고 놀지 않겠습니다.
동물 쇼를 가서 보지 않겠습니다. 그런 것으로 내 즐거움을 만들어 가지 않겠습니다.
 
 
이런 서원을  세우셨으면 하고 제안 드립니다.
오늘 서원법회는 그 동안 이야기 했던 것을 통틀어 아울러서
사부대중공동체 우리 모두의 서원으로 세울 것을 제안 드리면서 마치겠습니다.
 
강요는 아닙니다.
여러분의 삶 속에서 음식이나 이런 것들은 하루아침에 바꾸기 어렵고
바꾸기 어려운  환경에 처한 분들도 계실 것입니다.
그런 분들은 그러한 것들이 어떤 것인지,
그것이 불제자의 삶으로 떳떳한 것인지 아닌지 정도만 인식하고 이해할 수 있어도 큰 소득입니다.
그렇지 않은 분들은 그렇게 살아가고자 하는 자기 약속을 부처님에게 내 놓는 것,
부처님과 자기 스스로에게 약속하는 것,
이것이 자신의 삶을 부처다운 삶으로 만들어가는 서원이 되며 길이 될 것입니다. 
늘 그렇듯 부처님께 삼배를 올리며 법회를 마치겠습니다.
 
***
7월 서원법회 법문은 지안보살님께서 녹취를 해주셨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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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월 서원법회 법문을 이제야 올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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