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문] 화엄경세주묘엄품과...8강 전문(2011.11.12) > 법회와 설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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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현법회 | [법문] 화엄경세주묘엄품과...8강 전문(2011.1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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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실상사 작성일11-12-05 21:35 조회3,769회 댓글1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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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법스님 보현법회 11월 법문 
화엄경 세주묘엄품과 실상사.산내마을 법계공동체 8
 

일상의 거룩함을 알고 대자비심으로 살아가라
 
 
- 도법스님 (실상사 회주, 인드라망생명공동체 상임대표)

우리는 늘 편안하고 즐겁고 자유롭고 평화로운 삶을 희망합니다. 그렇지만 현실의 삶은 사실 고단하죠. 늙기도 하고 병들기도 하고 힘들기도 하고. 저도 그렇습니다. (웃음)
그런데 정말 어렵지 않고 아프지 않고 늙지도 않고 살면 정말 좋을까요? 어떻습니까? 과연 아픔이 없으면 건강의 좋음을 알 수 있을까요? 배고픔이 없어도 배부름의 기쁨을 누릴 수 있을까요? 만남의 기쁨은 누가 가져다 준 것일까요?
 
건강의 기쁨은 아픔이 가져다 준 선물이고, 배부름의 기쁨은 배고픔이 가져다준 선물이고, 만남의 기쁨은 헤어짐이 가져다준 선물이죠. 부처님이 준 것도 아니고 하느님이 준 것도 아니예요. 또한 늙음이 없었다면 젊음의 기쁨이나 아름다움을 과연 우리 삶속에서 확인할 수 있을까요? 죽음이 없었다면 삶이 좋다는 것을 우리가 누릴 수 있을까요? 아마 불가능할 것입니다. 인생의 실상이 이와 같습니다.
 
얼마 전에 유명을 달리한 스티브 잡스라는 사람이 한 이야기를 읽었는데, “죽음은 인간에게 준 아주 멋있는 선물이다”라고 했더라고요. 그 사람은 과학적인 안목이나 기술만 뛰어났던 게 아니라 인생에도 상당히 고수였던 것 같아요. 
 
근래에 우리 사회의 현실에서는 아주 놀라운 혁명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어떤 혁명이 일어났는지 아십니까? 늘 말씀드렸다시피 부처님 가르침은 특별한 것이 아니고 삶의 실상이 어떻게 존재하고 어떻게 변화하고 있는가에 대한 이야기거든요. 달리 말하면 실제 삶은 우리 생각, 내가 좋아하거나 좋아하지 않거나, 잘 알거나 모르거나와는 관계없이 늘 혁명적으로 이루어지고 있으므로 정신차려서 즉각 그 사실에 눈떠야 된다는 게 부처님 가르침의 기본이예요.
어떻습니까. 혁명이라고 하니까 무시무시한 생각이 들죠? (웃음)
최근에 어떤 혁명이 일어났습니까? 박원순 씨가 서울시장이 된 것이 혁명입니다. 사람들이 현실로 이루어질 수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이 현실로 이루어진 것이죠. 누구에 의해서 일어났습니까? 그렇습니다. 시민들의 각성에 의해서 일어났습니다. 그런데 그러한 시민의 각성이 저절로 이루어졌겠습니까? 그렇지 않죠. 이명박 정부나 기성정당들이 하는 게 시원치 않음으로 그에 자극을 받은 시민들이 “야, 이거 뭐야. 우리가 주인노릇 해야 되겠네”, 이렇게 마음먹고 나서게 된 것이죠. 그래서 결국은 일종의 시민혁명, 선거혁명이 일어난 것입니다.
 
이런 것을 불교에서는 무엇이라고 하는가. 제행무상(諸行無常)이라고 합니다. 제행무상은 끊임없이 변화한다는 말입니다. 우리가 변하지 않을 것이라고 믿고 있든, 변하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믿고 있든, 세상은 다 변한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사상도, 정신도, 신념도 모두가 변합니다.
어쩌면 혁명이라고 하는 것은 이와 같이 우리가 변하지 않을 것이라고 믿거나 바라는 것과는 관계없이, 실제로 변화가 이루어지는 것을 말하는 것이죠. 예를 들어 우리는 죽고 싶지 않지만 죽지 않는 사람은 없습니다. 생자필멸, 태어난 자는 반드시 죽게 되어 있습니다. 부처님 가르침은 다 이런 삶의 실상을 즉각즉각 제대로 알라는 거예요.
 
그리고 부처님은 또 뭘 말씀하고 계신가요? 일상의 거룩함에 눈뜨라는 겁니다. 거룩함은 하늘에 있는 것도 아니고, 티벳에 있는 것도 아니고, 법당이나 선방에 있는 것도 아니고, 성철스님이나 부처님에게 가야 있는 것이 아닙니다. 바로 지금 여기, 나 자신, 내가 만나고 있는 그대에게 거룩함은 있다는 것입니다. 부처님은 여기에 눈을 떠야 된다는 말씀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조금 전에 불렀던 <보현행원> 노래를 보면 ‘두 눈 어둔 이 내 몸 굽어살피사’라는 구절이 나오죠? 존재의 거룩함, 일상의 거룩함, 현장의 거룩함을 모르면 우리는 끝없이 헤매게 됩니다. 인도로 가기도 하고, 히말라야로 가기도 하고, 법당으로 가기도 하고, 교회로 가기도 하고, 성당으로 가기도 하고, 있지도 않은 하늘로 찾아가기도 하고, 알 수도 없는 내생을 향하기도 하면서 끊임없이 헤매고 헤매게 된다는 거죠. 즉 끊임없이 윤회하는 거죠. 아마 부처님 말씀을 다 모아서 한두 마디로 요약한다면 바로 ‘존재의 거룩함’, ‘일상의 거룩함’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사람들로 하여금 존재의 거룩함, 일상의 거룩함을 좀더 상식적으로 히해할 수 있도록 하고자 하는 것이 제가 하고 있는 보현법회의 문제의식입니다.
 
조금전에 제가 얼마전에 낸 책이야기가 나왔는데, 책 제목이 <망설일 것 없네 당장 부처로 살게나>입니다. 책이 나오고 나서 “이 책을 낸 의도가 무엇이냐”고 묻는 사람들이 더러 있었어요. 그 물음에 대해 제 대답은 이렇습니다. “한국 불교인들의 한을 풀기 위해서 이 책을 냈다.” 이게 무슨 말이냐면, 한국 불교인들이 갖고 있는 한이 있습니다. 그게 뭔지 아십니까? 무엇일 것 같으세요? (깨달음이요!) 그렇죠. 깨달아서 부처 되겠다는 게 우리 불교인들의 궁극적 꿈이죠. 그렇죠? 그리고 그 굼을 갖고 사는 대표주자가 스님들, 그중에서도 선방 스님들이고, 그 다음이 불교 지식인들이고… 대부분의 불교인들이 공통적으로 갖고 있는 꿈이 ‘깨달아서 부처 되겠다’는 거죠.
 
그런데 문제는 실제로 해보니까 잘 안 되는 거예요. 참선을 해도 잘 안 되고, 염불을 해도 잘 안 되고, 경전 공부를 해도 잘 안 되고, 십 년을 해도 잘 안 되고, 이십 년을 해도 잘 안 되고, 삼십 년을 해도 잘 안 되고… 정말 열심히 했는데 안 되면 한이 되겠습니까, 안 되겠습니까? 당연히 한이 맺히죠? 더군다나 인생의 모든 꿈을 내던지고 머리 깎고 수행하는 스님들의 입장에서는 더더욱 그렇죠. 정말 기가 막힐 일입니다. 그런데도 신도님들이 ‘스님, 스님’ 하고 스승으로 생각하고 따르고 있는데, 체면상 차마 속사정을 다 털어놓고 말할 수도 없고, 어디 가서 하소연도 못하겠고… 얼마나 답답하겠습니까. 따지고 보면 그 아픔이 보통 큰 게 아닙니다.
 
이처럼 불교인들이 갖고 있는 궁극적이고 공통적인 꿈이 깨달아서 부처 되겠다고 하는 것인데, 이 꿈이 애써 해도해도 실현이 안 된단 말이죠. 그러니까 또 무슨 소리를 합니까. “그건 세세생생 해야 되는 거여” 이렇게들 이야기를 해요. 도대체 세세생생 어떻게 뭘 하라는 이야기일까요? 그러니 세세생생 한을 안을 수밖에 없어요. 안 그런가요? 소원이 안 이루어지면 한이 맺히는 거잖아요. 그래서 한국 불교인들의 한풀이를 위해서 제 책의 제목에 ‘바로 부처로 살면 된다’는 내용을 넣은 거에요. 그리고 그 말은 다른 말이 아닙니다. 아까 말씀드렸던 것처럼 ‘일상의 거룩함’을 알고 그렇게 살아가자는 거지요.
 
부처 된다, 도를 안다는 이야기는 사실 다르지 않고 같은 거죠. 부처가 되었다는 것은 최고다, 다 되었다, 그 이상은 없다는 거죠. 공자는 “아침에 도를 알면 저녁에 죽어도 좋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대부분의 우리들은 스스로를, 지금 현실을 불완전하다고 믿기 때문에 늘 불만족이죠. 자기 자신, 내가 서있는 현장, 내가 만나고 있는 사람들에 대해서 늘 불만족스럽잖아요. 그렇죠? 대부분은 늘 불완전하다고 생각하고, 문제덩어리라고 생각하고, 마음에 안 든다고 생각하고… 온갖 것이 다 불만족스러운 거죠.
 
그래서 어딘가에는 완전한 것이, 완전해서 정말로 마음에 드는 것이 있을 거라고 찾아 헤매는 거죠. 하늘을 향해서 헤매기도 하고, 땅속을 향해서 헤매기도 하고, 전생을 향해서 내생을 향해서 헤매기도 하고, 동서남북을 향해서 헤매기도 하고… 자본주의라고 헤매고, 사회주의라고 헤매고, 진보라고 헤매고, 보수라고 헤매고, 온갖 것을 내걸고 뭔가 거기에 해답이 있을 거라고 여기 왔다 저기 갔다 엎어졌다 뒤집어졌다 그런 거죠. 어찌 고단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대부분의 우리들은 그러느라고 인생을 고단하게 살고 있는 겁니다.
 
처음에는 부처님도 그랬어요. 뭔가 특별한 게 있을 거라고, 어디엔가 내 속을 시원하게 뚫어줄 신비하고 거룩한 물건이 있을 거라고 생각하고 안 해본 것 없이 다 해봤죠. 사람들이 좋다고 이야기하는 건 다 해본 거예요. 그걸 두 가지로 구분하면 향락주의와 고행주의라고 하죠. 향락주의는 육체적으로 물질적으로 좋다고 하는 것을 추구하는 것이고, 고행주의는 정신적으로 심리적으로 종교적으로 철학적으로 좋다고 하는 것을 추구하는 것이죠. 아무튼 세상에서 좋다고 하는 것은 다 해봤습니다. 지금 한국불교식으로 말하면, 참선도 해보고, 기도도 해보고, 절도 해보고, 위빠사나도 해보고, 간화선도 해보고… 지고지순의 정신통일, 즉 성정체험도 해보고, 신비한 종교체험도 해보고, 안 해본 것이 없이 다 해봤다는 거죠. 그것도 보통으로 한 게 아니고 목숨을 걸고 했어요. 그랬기 때문에 무엇을 하든지 최고정점까지 가곤 했죠. 그런데도 해답이 안 나온 거죠. 결국 기존의 모든 것을 내려놓고 부처님이 스스로 깨달아서 내놓은 것이 팔정도예요.
 
팔정도는 다 아시겠죠? 팔정도를 요새말로 또는 우리 일상언어로 풀면 과학적 사고의 상식이라고 할 수 있어요. 팔정도에서 첫 번째 나오는 정견(正見)을 예로 들면, ‘잘 보라’는 거잖아요. 쉽게 이야기하자면 ‘지금 직면한 실상을 사실대로 잘 봐라, 네 품에 안겨 있는 네 아들, 네 딸보다 더 귀한 것은 이 세상 어디에도 없다’ 그러니까 지금 직면한 실상인 그대 자신, 또는 그대의 품에 안긴 아들 딸이야말로 이 세상에서 가장 거룩한 존재임을 사실대로 직시하고 아는 것이 정견이라는 이야기입니다. 어떻습니까. 매우 과학적 사고의 상식이죠.
 
아마도 대부분의 모든 부모들이 아들딸이 귀하다는 이야기는 수긍할 거예요. 그렇죠? 그런데 누군가가 부모인 자신을 귀하다고 하면 바로 수긍하십니까? 그건 잘 안 되죠? 아들 딸은 되는데, 자신에 대해선 수긍을 잘못하는 거예요. 왜 그럴까요? 관념 즉 전도몽상에 빠졌기 때문이예요. 존재의 거룩함에 대해 무지한 거죠. 그렇기 때문에 어디엔가 특별한 곳에 거룩함이 따로 있을 거라고 생각하며 계속 찾아다니는 거죠. 이런 걸 불교에서는 ‘소를 타고 있으면서 다시 소를 찾는 격’이라고 합니다. 소를 타고 있는 사람이 다시 어디 가서 소를 찾겠습니까? 스스로 소를 타고 있다는 사실을 알기만 하면 되는 거죠. 스스로 소를 타고 있다는 사실을 아는 것이 해답이지, 천지사방으로 소를 찾아다닌다고 소가 찾아지겠습니까. 절대로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습니다. 엄연한 이 사실을 잘 보고 알고 받아들이고 흔들림 없이 생활하면 삶이 자유롭고 평화롭다고 하는 것이 바로 불교요, 팔정도인 것입니다.
 
 
최근에 기쁜 소식이 하나 있었는데, 알고 계십니까? (…) 잘 모르시는 분이 많군요. 이런 게 바로 세상을 주의 깊게 잘 안 보고 있다는 증거죠. 팔정도의 정견은 잘 보라는 것인데, 세상을 제대로 보고 있지 않은 거죠. 잘 안 보면 걸려서 넘어집니다. 잘 안 보니까 인생이 고단한 거예요. 잘 안 보니까 일상의 거룩함이 안 보이게 되고, 일상의 거룩함이 안 보이니까 엉뚱한 곳에서 거룩함을 찾는 거죠. 돈에서 찾고, 히말라야에서 찾고, 티벳에서 찾고, 인도에서 찾고, 부처에게서 찾고, 신에게서 찾고, 자본주의에서 찾고, 사회주의에서 찾고, 화장품에서 찾고, 막걸리에서 찾고… 그런 것 아닌가요? 불교는 기본적으로 정신 바짝 차리고 잘 봐라, 여기에서 시작합니다. 잘 봐라, 안도 잘 보고 바깥도 잘보고 두루두루 잘 봐라. 그때그때 적재적소에 맞게 잘 보라는 게 불교예요.
다시 질문해볼까요? 최근에 기쁜 소식이 하나 있었는데, 그게 무엇일까요? (김진숙 씨가 크레인에서 내려왔습니다.) 그렇습니다. 김진숙 씨가 크레인에서 내려왔습니다.

 
그동안 김진숙 씨 문제는 국민들의 목에 걸려있는 가시와 같은 존재였습니다. 김진숙 씨가 무슨 개인적인 문제로 거기 올라가 있는 게 아니었잖아요. 쉽게 말하면 우리 사회에는 가진 자는 비인간적으로 전락하고, 못 가진 자는 비참하게 전락하게 되는 문제가 있고 이 문제에 대한 해답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죠. 한진중공업 문제가 발단이 되었지만 내용은 그런 거죠. 이게 누구의 문제입니까? 김진숙 씨 개인의 문제입니까. 바로 우리 모두의 문제입니다. 여러분 자녀들의 문제입니다. 많은 젊은이들이 죽기살기로 시험공부해서 대학교는 들어갔는데, 지금 우리 사회상황은 어떻습니까. 취직을 못해서 자살을 하니 어쩌니 난리지 않습니까.
 
김진숙 씨는 바로 이런 문제에 대한 해답을 내놓으라고 목숨 걸고 호소하고 있었던 거예요. 그런데 우리가 그것을 외면한다는 게 말이나 됩니까? 말이 안 되는 거죠. 이런 문제들에 대해서 내 문제가 아니라고 외면한다면 정견이 생활화되어 있지 않다는 이야기입니다.
어떻든 다행스럽게도 며칠 전에 한진중공업 노사간에 이 문제에 대해 합의가 되었고, 김진숙 씨가 크레인에서 내려왔습니다. 이 문제로 인해 야기된 상황을 지켜보던 국민들도 일단 목에 걸린 가시가 제거된 것이니까 기쁜 소식이라고 안 할 수 없죠.
 

이제 오늘 공부할 화엄경을 볼까요?
 
전 시간에 화엄경의 수행체계는 신해행증(信解行證)의 네 가지로 나눌 수 있고, 더 나누면 다섯 가지로 십신(十信), 십주(十住), 십행(十行), 십회향(十廻向), 십지(十地)로 나눌 수 있다고 말씀드렸죠? 사다리로 비유한다면 십신이 제일 첫 번째 단계, 그 다음 십주가 두 번째 단계, 십행이 세 번째 단계, 십회향이 네 번째 단계, 십지가 다섯 번째 단계라고 할 수 있어요.
 
그리고 지난 시간에는 십지를 상징하는 인물들에 대해 설명했습니다. 십지를 상징하는 인물들은 어떻게 사는 인물들인가, 그리고 그들이 본 부처님의 살림살이, 즉 그들이 알고 있는 부처님에 대해 이야기를 했습니다.
 
오늘은 그 다음 단계인 십회향을 상징하는 인물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비유를 들어 말해보면, 우리가 지금 실상사에 있는데 실상사 산내암자인 서진암에 가야만 인생의 꿈이 활짝 펴진다고 해봅시다. 불교로 말하면 깨달아서 부처된다는 말과 같은 것이죠. 어때요? 인생의 꿈이 활짝 안 피니까 사는 게 답답하고 고통스러운 거잖아요. 그래서 답답함에서 벗어나려고, 고통에서 벗어나려고 온갖 것을 다하는 거죠. 오늘 이 법회에 온 것도 마찬가지죠. 다른 이유가 무엇이 있겠습니까.
 
그래서 이 답답함과 고통에서 해탈해야 하는데, 그 해탈을 나타내는 곳이 서진암이라고 해봅시다. 어때요? 인생의 꿈이 활짝 펴진다는데 꼭 가야되겠죠? 바빠서 안 가실랍니까? (웃음) 자, 서진암에 가야 인생의 꿈이 활짝 피고 고통에서 벗어날 수 있다고 하는데 어디로 가야 서진암에 도달하는지를 모른다면, 얼마나 답답하겠습니까. 당연히 답답하겠죠.
 
그럴 때 누군가가 “서진암은 북쪽에 있어”라고 이야기를 해줍니다. 그리고 “서진암에 가려면 실상사 천왕문을 나서서 해탈교를 건너고 큰 길이 나오면 왼쪽방향으로 더 가서 매동마을로 올라가면 돼”라고 길을 잘 가르쳐줬다고 합시다. 어떻습니까. 꼭 가야할 곳이 어디, 어느 방향에 있는지, 가는 길은 어떤 길인지 확실하게 잘 알면 답답함이 풀리겠습니까, 안 풀리겠습니까? 당연히 풀리겠죠. 지금 서진암에 도달한 것은 아니지만 서진암으로 가는 길만 잘 알아도 아마 답답한 마음이 한숨 돌릴 만큼은 풀어지지 않겠습니까? 그렇죠?
 
부처님 가르침을 제대로 배우면 그렇게 되는 겁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부처님 가르침을 공부하는 사람이라면, 그 과정에서 아직 목적지에 도달하지는 못했다고 하더라도 우리가 가야할 곳이 어디에 있는지, 그곳에 가려면 어떻게 가야 하는지는 잘 알고, 확고한 확신이 있어야 합니다. 그런 정도의 답답함은 풀려야 된다는 말이죠. 그런데 그러한 답답함조차 풀리지 않고 있다면 불교 또는 경전공부를 제대로 못하고 있는 거죠. 우리가 불교공부를 제대로 못하고 있다는 것이니까 그건 가르치는 사람도 문제고 배우는 사람도 문제인 겁니다. 우리 목적지는 어디에 있고, 그곳으로 가는 길이 어떻다는 문제가 풀리지 않고 있다면, 우리가 백날 불교공부라는 이름으로 참선을 하고, 기도를 하고, 경전공부를 하고, 염불을 하더라도 문제가 있는 거죠. 불교를 제대로 못하고 있다는 얘깁니다. 그러면 안 되잖습니까? 그렇죠?
 
우리가 가고자 하는 곳이 어디인지, 어떻게 가는 것인지를 모른 채로 우리는 계속 특별한 어느 곳, 누구에겐가에 심오한 것이 있을 것이라는 무지와 착각으로 계속 찾습니다. 무상심심미묘법(無上甚深微妙法) - 높고 높고 깊고 깊고 오묘하고 오묘한 법을 찾아 동분서주하고 있어요. 그런데 그런 게 있을까요? 그런 거 없어요. 있긴 뭐가 있어요. 실상이 그런데도 우리는 있다고 생각하는 거예요. 아마도 우리는 깊은 것 찾다가 깊은데 빠져죽을 거예요.(좌중 웃음) 높은 것 찾다가 높은데서 떨어져 죽고… 우리는 지금 그러고 있는 거예요. 우리가 지금 살려고 공부하는 거지 죽으려고 하는 건 아닌데 말입니다.
 
다시 말씀드리면 우리가 가고자 하는 곳이 서진암이라면, 그 기초는 서진암은 북쪽에 있고, 가는 길은 이렇고 저렇게 생겼다는 것을 사실적으로 잘 아는 거예요. 그 다음 가고 안 가고는 본인의 몫이겠죠. 알려주는 것까지는 누군가 해줄 수 있지만, 가고 안 가고는 아무도 대신할 수 없잖아요. 하느님도, 부처님도, 부모님도, 그 누구도 대신할 수 없어요. 방귀뀌는 거나 마찬가지죠. 방귀를 누가 대신 뀌어줄 수 있나요? 절대 안 되지요. 죽으나 사나 본인이 뀌는 거죠. 숨을 대신 쉬어줄 수 있나요? 절대 불가능하지요. 좋으나 궂으나 자기자신이 쉬어야지요. 그렇죠?
 
이건 너무나 명백한 거예요. 불교는 이처럼 삶의 실상을 가르치는 거예요. 그렇게 복잡하고 어려운 것이 아니예요. 방귀는 아무도 대신 뀌어줄 수 없다 - 이게 심오한 거예요. 그것 말고 심오한 거 없어요. 숨은 자기가 쉬어야 된다 - 이게 높고 높은 거예요. 그것 말고 더 높고 심오하고 오묘한 것이 어디 있겠어요. 엄연한 실상을 떠나 다른 곳, 다른 것에서 높고 싶오하고 특별한 것을 찾고 있다면 그것은 토끼뿔, 거북털 같은 헛것을 찾고 있다는 것이지요.
 
자, 그러면 실제 불교수행이라는 입장에서 높고 깊고 오묘한 것은 무엇이고 어디에 있는 것일까요. 그것을 나타내는 것은 실천입니다. 인생의 꿈을 활짝 펼 수 있는 서진암을 찾아가야 하는데, 아무리 서진암이 어디에 있고 가는 길을 잘 알고 있다고 하더라도 실제로 가지 않으면 그것은 얕은 것입니다. 깊지 않은 거예요. 그러나 한 걸음이라도 갔다면 그것은 한 걸음 깊어진 것이죠. 두 걸음 갔으면 두 걸음 높아진 것이고, 세 걸음이라도 갔다면 세 걸음 오묘한 것입니다. 열 걸음 갔으면 열 걸음 미묘한 것이고, 천 걸음 갔으면 천 걸음만큼 신비한 것이고, 만 걸음 갔으면 만걸음 불가사의한 거예요. 그렇게 해서 드디어 서진암에 도달했다, 그러면 이런 것을 우리는 높다, 심오하다, 오묘하다고 말하는 거죠. 도달했다 이런 걸 우리는 심오하다 미묘하다 오묘하다 높다 이렇게 얘기하는 거죠. 그러니까 결국은 실천에 따라서 깊고 얕음이 좌우되는 거죠. 아는 것을 실천하느냐 안 하느냐가 문제라는 겁니다.
 
지혜라는 말 다 알죠? 부처님이나 나나, 남자나 여자나 지혜라는 말을 아는 건 다 똑같아요. 그러나 그 지혜가 깊이가 있는가 없는가, 높은가 낮은가, 미묘한가 아닌가는 다 똑같습니까 똑같지 않습니까. 똑같지 않죠? 그러면 그것은 무엇에 의해서 좌우되겠습니까? 바로 실천이죠. 실천하는가, 실천하지 않는가에 따라 좌우되는 거예요. 그런데도 우리는 실천할 생각은 안 하고 자꾸 엉뚱한 데서 기적을 찾고, 신비를 찾고, 불가사의를 찾고 있다는 겁니다. 이게 전도몽상인 거예요.
 
십신, 십주까지는 서진암이 어디에 있고, 어느 길을 따라 어떻게 가는가 하는 이야기에요.
십행은 실제로 직접 걸어가는 거예요. 십회향은 십행에 속하고요.
 
한 번 물어볼까요?
우리는 좋은 일을 하거나 좋은 것이 생기면 어떻게 합니까? (대중:나눠요)
진짜 나눠요? 솔직하게 이야기해요.(좌중 웃음) 
사람들은 좋은 것이 생기면 자꾸 자기 것으로 하려고 하잖아요. 그렇죠? 내 것, 우리 집 것, 내 편 것… 그렇게 만들고 싶어합니다. 십회향이라고 하는 것은 그러면 안 된다는 말이예요. 왜인가. 이 세상에는 내 것이 없거든요. 내 것이 없는데 우리는 그걸 잘 모르고 내 것이라고 착각하고 있는 거죠. 전도몽상이죠.
 
그게 다 두 눈이 어두워서 그러는 거예요. 실제 내용을 잘 보면[正見], 그런 것은 없습니다. 우리는 온통 함께예요. 그런데 안 보이니까 그냥 생각으로 만들어내는 거죠. 나라고 하는 게 있다, 내 것이라고 하는 게 있다고 생각하는 거죠. 이 사리사욕이 모든 문제의 원인입니다. 자본주의 사회가 문제인 것은 이 사리사욕을 정당한 것으로 믿게끔 만들고, 사리사욕을 추구하도록 끊임없이 자극하고, 확대시키고… 마치 그것을 쫒는 것이 인생의 희망인 것처럼 믿도록 만들기 때문인 거죠.
십회향이라고 하는 것은 그렇게 사리사욕에 따라 살면 안 된다는 거예요. 진리는 공평무사하다고 하죠. 진리로 이루어진 세상도 역시 공평무사하죠. 고로 내가 하는 것도 공평무사하게 쓰여야 하는 거죠. 내 것으로 만들면 안 된다는 겁니다. 공평무사한 것이 진리인데도 사람들은 세상이 공평하지 않다고 불평들 하죠? 그렇죠?
 
그런데 잘 보면 세상은 공평해요. 별로 동의를 안 하는 것 같네요. (웃음)
아주 불만스러운 눈치네. 그러면 한 번 예를 들어 증명해볼까요? 어떻습니까.
‘태어난 자는 반드시 죽는다.’ - 공평합니까, 불공평합니까?
‘들이쉰 숨 못 내쉬면 죽는다’ - 공평해요, 불공평해요?
 
자, 진보적인 사람이라고 예외가 있겠어요, 보수적인 사람이라고 예외가 있겠어요? 자본가인들 노동자인들, 기독교인인들 불교인인들, 스님들인들 재가불자인들, 사회주의자인들 자본주의자인들, 별 수가 있겠어요? 또 더 증명해볼까요? 하나마나 빤한 이야기지만.
‘먹고 똥 못 누면 죽는다’ - 뭐, 부처님인들 별 수 있겠습니까, 예수님인들 별 수 있겠습니까.
 
보십시오. 세상 이치는 그야말로 공평무사합니다. 공평무사한 세상을 불공평하게 만드는 건 인간들이예요. 예를 들어 물리적으로 여자가 힘이 약하고 남자가 힘이 강하다고 해서 진리의 세계가 불공평하다고 할 수 있을까요? 그것은 세상 진리가 그런 것이 아니고 무지한 사람들이 강자라고 해서 약자에게 함부로 하니까 그런 거잖아요. 그 결과 강자는 나쁜 놈이 되고 약자는 함부로 취급받으니까 비참해지는 거지요. 그래서 피차가 다 불행해지는 거죠. 이런 것을 자승자박이라고 합니다. 우리 스스로 문제를 만들어놓고 스스로 거기에 갇혀서 ‘죽네사네’, ‘죽일 놈 살릴 놈’ 하고 있다는 거지요. 전도몽상의 결과가 바로 이런 겁니다. 그래서 불교는 바로 이런 문제를 제대로 보고 제대로 다루어야 한다고 하는 겁니다. 끊임없이 불공평함을 만들어내고 있는, 두 눈 어둔 인간들에게 어떻게 공평무사한 법을 깨닫게 할 수 있을까, 하는 게 불교의 문제의식이죠. 빨리 전도몽상을 벗어나라고 말하는 겁니다.
 
따라서 십회향이라고 하는 것은 우리의 실천과 생활, 즉 우리의 사고와 언어와 행동이 진리의 정신에 맞게 해야 제대로 된 효과와 결과를 얻어낼 수 있다는 것을 가르쳐주는 것입니다.
오늘 이야기하는 십회향을 상징하는 인물들의 이야기도 마찬가지입니다.
같은 내용인데 도달한 위치의 입장에 맞추어서 이야기를 하는 거죠.
 
아까 실상사에서 서진암을 가는 것을 예로 들어 이야기를 했는데요. 덧붙여 설명하자면,
서진암이 어디에 있다는 것을 잘 아는 것을 십신이라고 할 수 있고,
서진암으로 가는 길과 방법을 잘 아는 것을 십주라고 말할 수 있어요.
그 다음 그 길과 방법에 따라 뚜벅뚜벅 걸어가는 것을 십행이라고 할 수 있죠.
그렇게 가면 그쪽으로 걸어간 만큼 서진암과 가까워지는 결과가 이루어지겠죠?
열 걸음 가면 열 걸음 나가고 있는 것이고, 백 걸음 가면 백 걸음만큼 진전된 것이지 않겠습니까?
그럴 때 그 성과를 혼자서만 사유(私有)하지 않고 골고루 함께 누릴 수 있도록 한다는 것을 일컬어 십회향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그런 과정을 거쳐서 서진암에 도달한 상태를 십지라고 하는데,
그것을 우리는 소위 깨달았다, 깨달음을 체험했다, 성인이 되었다, 완성했다고 표현하는 겁니다.
 
 
그러면 서진암이 어디에 있고 어떻게 가는지에 대해서 알았던 내용이 열 걸음 갔을 때와 스무 걸음 갔을 때와 같겠습니까, 다르겠습니까? 이건 좀 어려운 질문인가요?
이번에는 잘 생각해 봐야 됩니다. 지금까진 정견, 잘 봐야 된다고 했고, 이제는 정사유, 잘 생각해봐야 합니다. 잘 생각해보세요. 열 걸음 갔을 때와 백 걸음 갔을 때가 같을까요, 다를까요?
 
그럼 한 번 함께 생각해봅시다.
열 걸음 갔을 때와 백 걸음 갔을 때, 서로 같을까요, 다를까요? 당연히 다르죠.
반면 열 걸음을 갔든 백 걸음을 갔든 실상사에서 서진암에 가려면 천왕문에서 해탈교를 거쳐서 가야 한다는 것은 같을까요, 다를까요? 같겠죠. 그리고 서진암이 여전히 북쪽에 있다는 것도 마찬가지로 같겠죠.
 
그러면 결론은 같기도 하고, 다르기도 한 거네요? 그렇죠? 이게 무슨 말일까요? 부처님이 이것도 저것도 아니고 애매모호한 걸 가르친 걸까요? 그렇지 않죠. 그럼 부처님은 이런 경우에 대해 무엇이라고 말씀하셨을까요? 불일불이(不一不二), 즉 하나도 아니고 둘도 아니다, 같기도 하고 다르기도 하다, 라고 했어요. 즉 중도적으로 표현한 것이죠. 내용을 보면 열 걸음 가나 백 걸음 가나 서진암은 북쪽에 있고, 서진암 가는 길은 천왕문을 거쳐 해탈교로 가야 하므로 똑같아요. 그렇지만 열 걸음과 백 걸음은 엄연히 다른 거죠. 그렇기 때문에 불일불이라고 표현하는 것입니다.
 
 
한 번 더 짚어봅시다. 도대체 이런 이야기를 왜 하는 걸까요? 불교는 멍청한 소리를 안 해요. 불교는 대단히 똑똑한 종교예요. 대단히 명쾌한 가르침입니다. 태어난 자는 반드시 죽는다는 말처럼, 목마를 땐 물마시면 된다는 말처럼 정말 명료하죠. 그와 같이 명료한 게 부처님 가르침이예요. 그래서 어떤 사물이나 사건이나 그 실상에 대해 사실을 사실대로 말하다보니 ‘아, 그것은 같기도 하고 다르기도 해’라고 이야기하게 되는 거죠.
 
그러므로 여기서 말하는 게 다섯 단계로 설명되고 있지만 내용으로 보면 같은 이야기입니다. 다만 십지는 서진암에 도달해서 ‘서진암은 실상사에서 보면 북쪽에 있어. 실상사에서 서진암에 가려면 천왕문으로 나와서 해탈교를 건너서 이렇게 저렇게 걸어가면 돼’라고 말하는 거죠. 말하자면 서진암에서 그걸 설명하는 게 십지의 내용인 거죠. 그리고 십회향은 단계로 말하면 가는 도중에 있는, 여기서 보면 매동쯤 될까, 그 지점에서 똑같은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일 뿐이예요. 내용은 십지가 말하는 내용이나 십회향이 말하는 내용이나 같다는 거죠. 다만 열 걸음 가서 이야기를 하고 있는가, 백 걸음 가서 이야기를 하고 있는가, 천 걸음을 가서 이야기를 하고 있는가, 서진암에 도달해서 이야기를 하고 있는가가 다를 뿐이죠.
 
그렇기 때문에 오늘 공부하는 대목인 십회향에 대해 특별히 따로 설명하지 않아도 대충 다 짐작할 수 있는 내용들입니다. 그래도 그냥 넘어가기는 아쉬움이 있으시죠? 일단 십회향을 상징하는 인물들이 어떤 이름을 갖고 있는지, 또 어떤 삶을 살고 있는지 한 번 보겠습니다. 
 
***
‘또한 일 천자(日天子)는 청정한 광명으로 시방의 중생들을 널리 비춰
미래겁이 다 하도록 항상 이익하게 하는 해탈문을 얻었고,
광염안 천자(光焰眼天子)는 모든 종류의 중생을 따르는 몸으로 중생을 깨우쳐서
지혜의 바다에 들게 하는 해탈문을 얻었고,
수미광 환희당 천자(須彌光歡喜幢天子)는 모든 중생이 주인이 되어
그지없이 깨끗한 공덕을 부지런히 닦게 하는 해탈문을 얻었고,
정보월 천자(淨寶月天子)는 온갖 고행을 닦아 깊은 마음으로 환희하는 해탈문을 얻었고,
용맹불퇴전 천자(勇猛不退轉天子)는 걸림 없는 빛을 널리 비추어
모든 중생들로 하여금 그 정기를 더하게 하는 해탈문을 얻었고,
묘화영 광명 천자(妙華纓光明天子)는 깨끗한 빛으로 중생의 몸을 널리 비추어
기쁜 신심과 이해를 내게 하는 해탈문을 얻었고,
최승당광명천자(最勝幢光明天子)는 광명이 모든 세간을 널리 비춰서
갖가지 묘한 공덕을 마련하게 하는 해탈문을 얻었고,
보계보광명천자(寶髻普光明天子)는 큰 자비의 바다에 그지없는 경계의
갖가지 색상의 보배를 나타내는 해탈문을 얻었고,
광명안천자(光明眼天子)는 모든 중생의 눈을 깨끗하게 다스려서
법계의 창고를 보게 하는 해탈문을 얻었고,
지덕천자(持德天子)는 변함이 없는 청정한 마음을 내어 무너지지 않게 하는 해탈문을 얻었고,
보운행광명천자(普運行光明天子)는 해의 궁전을 널리 운전해서
시방의 모든 중생들을 비추어 짓는 업을 성취케 하는 해탈문을 얻었다.
***
 
십회향위를 상징하는 대표적인 인물에 대해 찬탄하는 대목의 첫 머리가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어떻습니까. 들어보니 좋습니까?(웃음) 무슨 말인지 아시겠어요? (대중:모르겠습니다)
네, 이걸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요. 하하. 그냥 좋다는 이야기예요. (웃음)
저도 이런 내용을 보통의 상식을 가진 분들이 이해할 수 있도록 설명을 하려니 죽겠습니다. (웃음)
그래도 한 서너 시간 앉아서 이러쿵저러쿵 예도 좀 많이 들어가면서 이야기를 하면 설명하는 사람도 듣는 사람도 수월할 텐데 짧은 시간에 하자니 참 갑갑한 노릇입니다.
 
그중에 하나만 봅시다.
 
‘광명안천자는 모든 중생의 눈을 깨끗하게 다스려서 법계의 창고를 보게 하는 해탈문을 얻었고’
 
광명안천자는 이렇게 살았다는 거죠. 여러분은 ‘광명’이라고 하면 무엇이 떠오릅니까? (희망), (밝음)…, 아까 보현행원 노래에서 ‘두 눈 어둔 이 내 몸’이라는 구절이 있었잖아요. 광명은 눈이 밝아졌다는 것을 말하죠. 봉사가 눈을 떴다는 말입니다. 눈이 캄캄했었는데 환해졌다는 겁니다.
‘어둡다’는 건 ‘안 보인다’, ‘제대로 보지 못한다’는 것이죠? 잘 안 보이면 어떻게 됩니까? 문제가 생기겠죠. 우리가 길 잃고 충돌하는 문제들은 대부분 잘못 보는 데서 비롯됩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되겠습니까? 제대로 안 보이면 어떻게 해야죠? 잘 봐야겠죠? 주의 깊게 잘 봐야 합니다. 제대로 보면 문제가 풀립니다. 잘 보는 것, 제대로 보는 것이 광명입니다. 우리는 ‘광명’ 하면 뭔가 신비한 것을 생각하게 되죠? 부처님 머리에서 샤악~ 하고 무엇인가 나온다든가 하는 거요. 그런 것들은 그냥 상징적인 표현들입니다. 그림으로 표현할 때 특히 그러잖아요. 중요한 뭔가를 표현해서 사람들로 하여금 생각하게 만드는 거죠.
 
다음으로 ‘법계의 창고’라는 말은 무슨 말일까요? ‘창고’ 하면 얼른 떠오르는 게 무엇인가요? 보물이죠? 온갖 보물이 꽉 차있는 창고를 보게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온갖 보물이 꽉 차있는 창고를 보게 한다는 것은 무슨 말일까요?

누누이 말씀드렸듯이 불교는 존재의 거룩함, 일상의 거룩함을 가르치는 것이고, 불교수행은 존재의 거룩함, 일상의 거룩함에 눈뜨는 것입니다. 보물창고를 보게 한다는 것은 바로 그 말입니다. 나 자신이 보물창고요, 내가 발을 딛고 있는 현장, 내가 만나고 있는 사람이 바로 보물창고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눈이 어두워서 그것을 제대로 보지 못하고 다른 곳에서 보물을 찾아 헤매고 있고 그래서 문제투성이가 되고 맙니다. 그러나 나 자신이 보물창고요, 내가 발을 딛고 있는 현장, 내가 만나고 있는 사람이 바로 보물창고라는 것을 알면 어떻게 될까요? 당연히 기분이 좋겠죠? 그리고 나 자신을, 내가 살아가는 현장을, 내가 만나고 있는 사람을 함부로 하지 않겠죠. 그리고 제대로 쓰겠죠. 이런 게 여기에서 말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해탈문을 얻었다’는 말은 자유자재로 보게 한다는 말입니다.
 
 
자, 그러면 광명안천자는 누구겠어요? 중생들로 하여금 어두운 눈을 밝게 해서 보물창고를 보게 하는 사람입니다. 그러면 여기서 말하고자 하는 게 무엇이겠어요? 광명안천자는 대자비심으로 살아가는 사람이죠? 중생들로 하여금 어두운 눈을 밝게 해서 보물창고를 보게 하는 것이잖아요. 결국 여기서 말하고자 하는 것은 대자비심으로 살아가고 있다는 거죠. 이런 표현을 열 가지로 하고 있는 거예요. 늘 말하지만 이 대자비심이야말로 인생의 도깨비방망이, 만병통치약, 여의주입니다.
 
그 다음에 나오는 이야기는 이 인물들이 등장해서 부처님에 대해 설명하는 내용입니다. “내가 보니까 부처님 콧구멍이 두 개야” 그렇게 설명하기도 하고, “내가 보니까 부처님은 발이 두 개던데” 이렇게 설명하기도 하고, 어떤 사람은 “내가 보니까 부처님은 얼굴이 황금빛이야” 이렇게도 하고… 인물마다 등장해서 부처님에 대해 설명하는 거예요. “부처님은 축구를 잘해”라고 설명하기도 하고, “부처님이 방귀 뀌던데”라고 설명하기도 하고요… 아무튼 이렇게 저렇게 자기가 본 부처님에 대해서 설명하는 거예요.
 
어떻습니까. “부처님은 코가 하나야”라고 하면 사실과 맞습니까, 안맞습니까? 맞지요? “부처님은 얼굴빛이 인도사람 얼굴빛이야”라고 하면은요. (맞습니다.) 그러면 한국 부처님은 얼굴빛이 어떤 빛이었을까요? 한국사람 얼굴빛이었겠죠. 그런데 이렇게 보니까 여기 계신 분들이 다 부처님하고 똑 같네요. 코도 하나고, 발도 두 개고, 얼굴빛도 한국사람 얼굴빛이고… 그러면 여기 계신 분들이 다 부처님이네. 그렇죠? (좌중 웃음)
 
바로 이것이 일상의 거룩함, 현장의 거룩함, 존재의 거룩함입니다. 이것에 눈을 뜨게 해주는 게 자비심이고, 이것에 눈을 뜨게 해주는 삶을 사는 사람들이 자비심으로 사는 사람들입니다. 부처님은 어떻게 생겼고 어떻게 사는 분인지를 일러주는 거죠.
 
그런데 여기서 한 사람 한 사람이 부처님에 대해 뭐라고 했는지 다 읽어봐야 할 텐데 너무 많아서 그렇게 할 수 없기 때문에 대표적인 한두 구절만 보겠습니다.
 
***
광명의 그물을 놓아 불가사의함이여
널리 모든 중생들을 깨끗하게 하사
모두 다 깊은 믿음과 이해를 내게 하시도다.
***
 
‘광명’에 대해서는 아까 말씀드렸고, 여기서 그물은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요? 광명의 그물을 놓는다는 것은 중생들을 다 건진다는 말입니다. 고해에 빠져 있는 중생들, 또는 암흑의 바다, 미혹의 바다, 고통의 바다에 빠져 있는 중생들을 다 건진다는 건데, 밝은 눈이 아니면 볼 수 없겠죠. 그러니까 밝은 눈으로 그물을 쫘악 던져서 건진다는 거예요.
 
그러면 암흑의 바다에 빠진 중생들을 건져서 무엇을 하자는 것인가. 뒤의 구절은 그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깊은 믿음과 이해를 내게 한다’, 즉 사람들로 하여금 존재의 거룩함, 일상의 거룩함, 현장의 거룩함을 알고 믿게 한다는 거죠. 더 쉽게는 본래부처임을 알게 한다는 말과 같습니다.
 
자, 존재의 거룩함, 일상의 거룩함, 현장의 거룩함이라는 게 실감이 잘 안 나죠?
예를 들어볼까요? 물고기에게는 1억짜리 서울 땅이 좋겠습니까, 공짜인 물이 더 좋겠습니까?
물고기에게는 1억짜리 서울 땅보다 물이 더 좋죠. 물고기에게는 물이 더 거룩하죠. 우리가 살고 있는 현장도 마찬가지예요. 그런데 불행하게도 우리들은 돈에 눈이 멀어서 그 거룩함의 가치가 안 보이는 거예요. 못 보는 거죠. 그러할 때 그 거룩함의 가치에 눈을 뜨신 분이 부처님이고, 중생들로 하여금 그 거룩함의 가치에 눈을 뜨도록 하는 게 부처님이 하는 일이라는 겁니다. 그중에 대표적인 게 뭐죠? 왕자 자리가 거룩한 자리라고 다들 믿고 있는데, “그거 별 거 아냐” 하고 버려버립니다. 그리고 어디로 가셨습니까. 바닥 세상으로 갔습니다. 바닥 중에서도 어디로 가셨죠? 밥을 얻어먹고 사는 거지로 갔습니다. 그렇게 사신 분이 부처님입니다.
 
‘깊은 믿음과 이해를 내게 한다’는 것은 중생들이 일상의 거룩함, 존재의 거룩함, 현장의 거룩함을 잘 알고 확신하게 해서 쓸데없이 다른 데 힘쓰지 않게 한다는 말입니다.
화엄경의 이 대목에서는 이런 식으로 열 분의 인물들이 등장해서 부처님에 대해 이러쿵저러쿵 설명하고 있는데, 표현은 다르지만 내용은 거의 같은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오늘 이 이야기를 들으면서 우리가 내려야 하는 결론은 무엇입니까.
정리해보면 십회향을 상징하는 인물들의 삶도 그런 내용이었고, 그분들이 표현한 부처님의 살림살이 내용도 그러한 것이었습니다. 그 내용은 두 가지인데, 하나는 일상의 거룩함, 존재의 거룩함, 현장의 거룩함, 즉 본래부처에 대해 제대로 보고 아는 지혜이고, 다음은 본래부처답게 대자비심으로 젖먹은 힘을 다해 현장에서 실천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결론은 그렇습니다.
 
그러면 그게 가능해지려면 무엇을 해야 합니까.
먼저 잘 봐야 합니다. 직면한 현실을, 직면한 존재를. 그것은 자신일 수도 있고 상대방일 수도 있고, 또 현장일 수도 있겠죠. 잘 보면 존재의 거룩함, 일상의 거룩함, 현장의 거룩함, 즉 본래부처가 보입니다. 그리고 본래부처니까 부처답게 살아야겠죠. 부처답게 사는 삶은 무엇인가. 바로 대자비심으로 사는 것입니다. 존재의 거룩함, 일상의 거룩함, 현장의 거룩함, 즉 본래부처라는 것은 나에게 모든 것을 다 이루어낼 수 있는 가능성과 조건을 갖추고 있음을 뜻합니다. 내 인생은 내 손에 주어진 도깨비방망이요 여의주입니다. 그것을 어떻게 쓸 것인가는 오로지 본인 마음대로입니다. 주어진 것을 대자비심으로 쓰기만 하면 그야말로 희망의 길이 활짝 열리게 됩니다.
 
초기경전에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
부처님 당시 날도 좋고 달빛도 좋은 어느 날, 코살라국의 파세나디 왕과 말리까 왕비가 함께 차를 마시고 있었습니다.
그때 왕이 묻습니다.
“말리까여, 그대에게는 그대 자신보다 더 사랑스런 다른 사람이 있소?”
“대왕이시여, 나에게는 나 자신보다 더 사랑스러운 다른 사람은 없습니다.
 대왕이시여, 폐하께서는 자신보다 더 사랑스러운 다른 사람이 있습니까?”
“말리까여, 나에게도 나 자신보다 더 사랑스런 다른 사람은 없소”
(상윳따니까야, 말리까경)
***
 
물론 왕이 바랐던 대화는 이런 게 아니었겠죠? 실제로 이 대화는 파세나디 왕이 왕비를 격려하려고 시작한 것이었습니다. 말리까 왕비는 하녀출신이었고 다른 비빈들보다 얼굴이 예쁜 것도 아니었기 때문에 기가 좀 죽어있었거든요. 파세나디 왕은 왕비가 “제게 가장 사랑스러운 사람은 폐하입니다.”하는 대답을 하리라 기대했고, 그러면 자신도 “내게 가장 사랑스러운 사람도 당신이오”라고 말해주려던 참이었거든요. 그런데 왕비는 곰곰이 생각하더니 앞의 내용처럼 잘라 말한 거죠.
여러분도 함께 생각해보십시오. 남편이나 아내가 그렇게 물었을 때 여러분은 뭐라고 대답하시겠습니까? 십중팔구는 “당연히 당신이지. 그걸 왜 물어” 하겠죠? 안 그런가요? (대중:네. 그럴 거예요.) 그런데 말리까 왕비는 그러지 않았습니다. 아마 파세나디 왕은 많이 서운했을 거예요. 그렇죠? 그렇지만 자신도 곰곰이 생각해보니 왕비의 말이 맞다고 생각되어 “내가 생각해도 그렇다”고 말하죠.
 
그렇게 해서 두 사람이 공동의 결론에 도달하기는 했지만 뭔가 석연치 않은 느낌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부처님께 찾아가서 물어보자고 합니다. 불교를 하려면 이 왕과 왕비처럼 이렇게 해야 합니다. 자기 일상의 삶에서 생겨난 의문이나 문제들을 불교적으로 어떻게 생각하고 살아가야 하는지를 끊임없이 물어야 합니다. 그런데 제가 보기에는 우리 불교신자들은 그런 질문이 별로 없습니다. 대부분은 절에 와서 기도해 달라, 이름 부르고 축원해 달라, 염불해 달라는 요청을 하지, 인생이 무엇인지, 어떻게 살아야 참되게 사는 것인지를 묻는 사람은 거의 없어요.
 
어떻든 그렇게 해서 왕비와 왕은 부처님을 찾아갑니다.
부처님을 찾아가서 자초지종을 말씀드리니, 부처님께서는 이렇게 게송으로 말씀하십니다.
 
***
“사람은 어디라도 갈 수가 있다.
하지만 어디를 향하더라도 사람은 자기 자신보다 사랑스러운 것을 발견할 수는 없다.
그와 마찬가지로 다른 사람들도 자기 자신은 더없이 사랑스럽다.
그러므로 자기 자신의 사랑스러움을 아는 사람은 다른 사람을 해치지 않는다.”
***
 
자, 부처님의 대답도 가장 사랑스러운 존재는 자기 자신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그렇게 자기존재의 실상을 바로 봄으로써 뭇생명의 실상을 함께 보고 더불어 살아가는 존재들의 소중함을 인식하도록 이끌어주시죠. 자비심을 가지면 항상 이렇게 인식을 넓혀가게 되어 있습니다.
 
자, 우리도 해볼까요? 자신이 그렇게 중요한 존재요 사랑스러운 존재라면 자신을 어떻게 해야 할까요? 당연히 평화롭게 해야겠죠. 자신이 평화롭게 되려면 어떻게 해야 되죠? 예를 들어 아내와 남편을 놓고 본다면 어떻게 해야 될까요? (대중:서로를 사랑해야죠) 그렇죠. 남편은 아내를 사랑해야 삶이 평화롭습니다. 아내는 남편을 사랑해야 삶이 평화롭겠죠. 달리 다른 방법이 또 있을까요? (대중:없습니다.) 네, 없습니다. 이게 연기법이고, 불교의 다르마입니다.
 
그런데 보통은 누구나 자기 자신을 위해 내 것이 있어야 하고, 나를 위해 무엇인가를 해야 한다고 생각하죠. 내 편하게 내 마음대로 내게 유리하게 하는 것을 당연하게 생각해요. 그게 자신에게 유익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그렇게 하는 거죠. 그런데 실제는 어떻게 될까요? 당연히 갈등과 대립, 고통과 불행으로 귀결되지요. 이걸 가르쳐주는 게 불교에요. 상대를 사랑하지 않고는 자신을 사랑할 수 없습니다. 상대를 욕하면 상대도 나를 욕하죠. 스스로 욕 듣게 만들면서 스스로를 사랑한다는 게 말이 됩니까? 스스로 욕 먹도록 하면서 자신을 사랑한다고 하는 것은 말이 안 되죠.
 
그럼 욕 안 먹도록 또는 칭찬을 듣도록 자기를 사랑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상대에게 욕을 안 해야죠. 내가 상대를 존중하면 상대도 나를 존중하게 되어 있어요. 자신을 사랑하려면 상대를 사랑하라. 그래서 우리 속담에도 있잖아요. ‘가는 말이 고우면 오는 말도 곱다’고. 불교가 다른 것을 가르치는 게 아니예요. 불교가 이런 거예요. 이런 게 거룩한 것이고, 이런 게 심오한 것이고, 이런 게 신비한 것이죠. 왜 신비합니까. 가는 말도 곱고 오는 말도 곱고, 그러면 어때요? 화목하죠? 평화롭죠? 가는 말이 고우니 오는 말이 곱고, 그러면 화목하고 평화롭다 - 이게 신비가 아니라면 무엇일까요. 이게 기적이 아니고 무엇이겠어요. 이게 바로 불가사의고 이게 불법의 영험인 거죠.
 
불교를 하려면 일상에서 이런 거룩함과 신비함과 기적과 불가사의함의 영험이 바로 나타나도록 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고 그 밖의 다른 신비함, 거룩함, 영험스러움을 찾으려고 들면, 제가 말리지는 않겠지만,(웃음) 훗날 반드시 후회하게 될 것입니다. 제 말이 틀리면 제 손에 장을 지질 수 있습니다.(좌중 웃음) 불교는 이런 거라는 것을.
 
그러면 속담과 부처님 법은 차이가 없는 것일까요? ‘가는 말이 고우면 오는 말도 곱다’라는 속담은 경험을 통해 사람들이 터득한 인간의 진리입니다. 반면 부처님 법은 똑같이 ‘가는 말이 고우면 오는 말도 곱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단순한 경험적 진리가 아니라 이 세상이 존재하는 법칙과 질서를 통찰한 결과라는 점입니다. 본래법 자체가 너를 사랑하지 않고서 나를 사랑할 수 없다고 되어 있다는 거죠. 그래서 처음부터 끝까지 ‘자비심’, ‘자비심’ 하고 있는 것이기도 하고요.
 
그런데 그 내용을 이해하면서도 정작 그 한 생각 바꾸는 게 의외로 어렵죠. 그러므로 더 자기중심의 이기심을 비우고 자비심을 발휘하라고 더 강조하게 됩니다. 잘 모르더라도 자비심으로 보고, 말하고, 행동하고 그렇게 하다보면 절로절로 무르익기도 하고, 더 풍부해지기도 하고, 깊어지기도 하고, 그렇게 되어간다는 거죠. 그렇게 하면 날마다 좋은 날이 되는 그런 삶이 가능해진다는 것입니다.
 
부처님의 팔만사천법문도 마찬가지입니다. 본래 잇는 법, 본래부처라는 내용을 병에 따라, 번뇌에 따라 이렇게도 이야기해보고 저렇게도 이야기해보고 그런 겁니다. 오늘부터 우리도 고운 말이 돌아오도록 보내는 말을 곱게 보내는 다르마의 길을 투철하게 가는 불교를 하십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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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상사 법문은 copyleft입니다. 좋은 법보시가 되겠죠.
어디든 퍼다 나를 수 있어요. 물론 출처는 꼭 밝히셔야 되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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