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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현법회 | [법성게강의] 생사가 본래 없다 ... 회주 도법스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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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실상사 작성일15-07-21 17:08 조회4,012회 댓글1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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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5-06-21 보현법회 회주 도법스님 <법성게> 법문
 
 
생사가 본래 없다
 

예전에는 지구촌이라고 했는데, 요즘은 온 우주를 돌아다니고 있죠. 안방에 앉아서 영상으로 우주를 체험하는 시대입니다. 또 물질적으로 보면 얼마나 풍요롭습니까. 지금의 풍요로움은 단지 100년 전만 하더라도 국왕이나 받을 수 있는 수라상의 수준이죠. 그런 수라상들을 요즘은 일반인들이 아침 저녁으로 받고 있는 셈입니다. 어쩌면 예전의 임금들보다도 더 잘 먹고 있다고도 할 수 있겠어요. 한 여름에 수박도 먹고, 참외도 먹고, 그것도 한 겨울에도 말입니다. 아마 사회의 물질적 조건은 인류역사상 최고의 조건이라고 할 수 있을 거예요.
 
그런데 메르스 바이러스 소식으로 온 나라가 쩔쩔 매고 있습니다. 전염병이 오니까 온 나라가 전전긍긍입니다. 메르스 문제는 여러 가지 각도에서 이야기를 해볼 수 있겠지만, 오늘 이 자리에서는 우리들이 죽음을 대하는 태도에 대해 생각해볼까 합니다.
 
일단, 누구에게나 죽음이라는 게 정말 두렵습니다. 무섭죠. 대통령보다도 부처님보다도 무서운 것이 죽음이죠. 요즘 서울을 오가다 보면 식당에 가도 사람이 없고, 조계사에도 사람의 발길이 많이 끊어졌죠. 고속도로에도 차량통행이 한산해졌습니다.
 
만약 이런 상황이 계속 되면 어떻게 될 것 같습니까. 우리는 어떻게 할 것 같아요? 언제 어디에서 누가 병에 걸리기도 하고 죽기도 하는, 이런 상황이 멈추지 않고 계속 된다면 우리는 어떻게 할 것 같아요?
끔찍해서 그런 상황은 생각도 하기 싫죠?
 
그런데 말입니다. 주의깊게 관찰해보면 우리가 살고 있는 실제 삶 자체가 사실은 늘 이렇게 불안하고 위험한 상황이란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인간 세상이 시작된 이래 이렇게 두렵고 위험한 상황이 아닌 적이 없어요. 그게 인간세상이예요. 우리들이 그것들을 잘 관찰하지 않는 거죠. 간혹 그런 불안하고 위험한 상황을 겪고 또 일어날 수 있는 상황이라는 것을 알고 있다 하더라도 금방 잊어버려요. 불안하고 위험한 상황에 주의를 기울이지 못하게 하는 것들, 망각하게 하는 좋은 꺼리들이 주변에 많이 있는 거죠.

그런데 우리는 그것들을 잘 관찰하지 않고 어떨 때 한 번 겪었다 생각했는데, 금방 잊어버리기도 하고.  어쩌면 그런 것들을 망각할 수 있는 좋은 것들이 많이 있는 거죠. 늘 두렵고 위험한 상황인데. 그것을 망각할 수 있는 거리가 너무 많은 거죠. 
 
 
부처님은 늘 위험한 상황임을 가르쳐 ‘삼계화택(三界火宅)’이라고 했습니다. 보통 사람들이 탐내고 성내고 어리석은 마음으로 살아가는 세상을 삼계라고 하죠. 이 세상이 ‘화택(火宅)’, 즉 불난 집과 같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어디가 편안하고 안전할 수 있겠습니까? 우리는 메르스 상황만 위험한 것으로 보는데 사실은 언제나 불안하고 위험할 수밖에 없는 거죠. 그런가 하면 불안함을 잊어보려고 재미있는 것을 찾기도 합니다. 그게 중생살이라는 거죠.
 
요새 메르스 파동을 보면서 병고의 문제와 죽음의 문제가 우리에게 정말 중요한 일임을 거듭 확인하게 됩니다. 그 문제들을 두고 불안해하거나 회피하는 것보다는 정면으로 마주해서 그것이 주는 불안과 공포에서 벗어나 홀가분해질 수 있는 준비를 하는 게 지혜로운 길이지 않겠습니까?
 
삼계화택이기 때문에. 삼계가 불타고 있는 집이기에 어떻게 하면 우리가 불타고 있는 집에서 벗어나 불안과 공포에 떨지 않고 살 수 있을까, 하는 것이 부처님이 일생을 강조하신 것이죠. 이번에 메르스 파동을 보니까 이 부분을 다시 한 번 확인하게 되더라 이 말입니다.
 
그런데 사실 죽음으로 인한 불안과 공포를 벗어나기는 그리 쉬운 문제가 아니죠.
그런데도 부처님은 불안과 공포를 벗어날 수 있다고 합니다.
 
불교에서는 ‘생사가 본래 없다’라는 말을 합니다. 우리가 불안과 공포에 떨어야 하는 그런 죽음은 본래 없으며, 다만 착각하고 있을 뿐이라는 거죠. 잘 모를 때는 생과 사가 엄연히 있지만, 제대로 알고 보면 생과 사는 본래 없다는 거죠.
 
‘생사가 본래 없다’는 것을 가장 잘 표현하고 있는 것이 요즘 우리가 공부하고 있는 법성게입니다. 그럼, 법성게 원문을 읽어가면서 연결을 시켜볼까요?
 
 
여기 한 사람 있으니 그의 본래 참모습은
온 우주 두루두루 어울려 한 번도 나누어진 적 없고
긴긴세월 흐르고 흘러도 언제나 항상 그 모습이며
본래 정해진 이름도 없고 따로 정해진 모습도 없으니
오로지 실천하는 지혜로 알 뿐 그 밖의 다른 길 있지 않네
 
 
사실은 이 네 구절에 부처님이 말하고자 하는 내용이 다 들어있다고 할 수 있어요.
그 아래는 거기에 대한 구체적인 설명들인 셈이예요.
 
 
그의 본래 참모습은 지극히 심오하고 미묘하여
자신을 고집하지 않고 인연 따라 온갖 모습 이루니
하나 안에 일체가 깃들고 여럿 안에 하나가 깃들며
하나가 그대로 일체요 일체가 그대로 하나이며
한 먼지 온 우주 품어 안고
온갖 먼지들도 또한 그러하네

끝없는 영원의 시간이 그래도 지금 여기 한 순간이요
지금 여기 한 순간이 그대로 끝없는 영원의 시간이며
과거, 현재, 미래 모든 시간들과 지금 여기 한 순간이 함께 있어도
혼란스럽지 않고 질서정연하게 시간마다 따로따로 이루어지네
 
 
법성게에서 이 부분까지가 "내가 살고 있는 세상은 어떤 곳인가", "인생이란 무엇인가", "나는 누구인가"라는 물음에 대한 설명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내용을 그림으로 표현한 게 아래 그림들입니다.
그것을 그림으로 표현한 게 아래 그림들입니다.
 
 
첫 번째 그림은 일원상입니다.
 
01 일원상.jpg
 
많은 사람들이 이 일원상을 원불교 로고로만 알고 있지만 이것은 본래 이런 내용인 거지요. 둥근 원(圓)은 시간적으로 영원성을 나타낸 것이고, 공간적으로는 무한성을 나타난 것입니다.
 
우리 모두는 무한히 큰 존재이고 싶고 영원한 생명을 갈구하지요?
나에게 주어진 시간, 나에게 주어진 공간은 우리에게 공짜로 주어져 있습니다. 그러면 나는 어떤가요? 나라는 존재도 공짜로 와있는 거죠. 여러분은 대학교 나왔다고 태어난 것도 아니고 이쁘다고 태어난 것도 아니죠. 시험봐서 태어난 것도 아니고요. 가난하든 귀하든 신분이 어떻든 간에 태어나는 것은 그냥 주어진 거예요. 그러니 공짜로 태어나 있는 셈이죠.
 
 
법성게를 첫 구절을 다시 봅시다.
‘온 우주 어울려 서로서로 나뉘어진 적 없고’ - 이것은 공간적으로 그렇다는 이야기죠. ‘긴긴 세월 흐르고 흘러도 언제나 항상 그 모습이며’ - 이것은 시간적으로 그렇다는 이야기입니다. 과거에도 그랬고 현재에도 그렇고 미래에도 그렇다는 것입니다. 그 다음에 이어지는 구절은 존재의 참모습에 대한 부연설명입니다.
 
두 번째 그림은 삼보륜(三寶輪)입니다.
 
02 삼보륜.jpg
 
어디서 많이 본 그림이죠? 지금 조계종단을 상징하는 무늬죠. 아까 일원상과 다른 점이 무엇이죠? 점 세 개가 더 있는 것이 다르죠. 일원상에 표현은 안 했지만, 일원상이 말하고 싶은 것도 이 삼보륜과 같아요. 일원상 안에 불법승(佛法僧) 삼보(三寶)를 점 세 개로 표현한 것입니다.
우리 역사에서 영원한 존재, 무한한 존재로 살아간 사람이 있는데 그게 누구일까요? 맞습니다. 석가모니 부처님이죠. 삼보의 첫 번째, 즉 여기서 점 하나는 거룩한 부처님을 뜻합니다. 부처님은 영원과 무한의 세계, 영원과 무한의 존재를 사실적으로 잘 아셨고, 또 그러한 삶을 살아서 완성자가 되셨죠. 세상에서 인간이 살고 싶은 삶을 이루어낸 사람이 된 것입니다.
그런 삶이 어떤 삶입니까. 사람들은 그것을 무한의 의미를 갖고 영원한 생명력으로 살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하죠. 그것을 더 대중화시키고 현실화시키면 평화롭고 행복하게 살고 싶다고 할 수 있겠죠. 그러한 삶을 실현한 사람, 그 대표주자가 부처님인 거예요.
그리고 부처님 당신이 그렇게 살아보니 좋기 때문에 사람들에게도 그렇게 살면 좋다고 알려주는 거예요. 그게 부처님 가르침이고, 두 번째 점은 그 가르침, 즉 법보(法寶)라고 합니다.
세 번째는 승보(僧寶)입니다. 이 승보라는 말은 지역마다 시대마다 달리 해석되기도 하고 달리 쓰이기도 합니다. 대승불교 전통을 잇고 있는 한국불교에서는 승보를 스님이라고 합니다. 삼귀의 노래할 때도 ‘거룩한 스님들께 귀의합니다’라고 하잖아요.
 
그런데 승(僧)이라는 말은 범어(梵語)인 상가(Samgha)를 음역하여 쓴 것인데, 스님 개개인을 일컫는 말이 아니었죠. 인도에서 상가는 원래 공화국이나 조합을 의미하는 말이었습니다. 출가하는 사람이 늘어나고 스님들이 한 곳에 모여 살게 되면서 공화국이나 조합의 운영방법을 받아들이면서 부처님 교단을 일컫는 말로 쓰게 된 거예요. 그러니까 상가 또는 승가는 공동체를 말하는 거예요. 처음에는 승원의 구성원이 비구, 비구니였기 때문에 스님들로 연결이 되었겠죠. 바꾸어 말하면 승가는 부처님 가르침에 담겨 있는 깊은 뜻이 실현될 수 있도록 내 인생을 걸고 살겠다고 마음을 내서 함께 사는 사람들의 모임이라고 할 수 있는 거죠.
이렇게 보면 승가는 부처님 가르침에 따라 더불어 살아가는 공동체인 거죠. 부처님 당시에는 스님들이 한 곳에 모여 살았으니까 주로 스님들의 모임이었던 것이고, 이후 대승불교에 오면 사부대중의 모임, 사부대중공동체라는 의미를 갖게 된 거죠. ‘삶에서 부처님 가르침을 실현하겠다’고 뜻을 낸 사부대중공동체를 승가라고 표현할 수 있다는 거죠. 시대마다 다르지만 한국불교에서는 그렇게 해석되는 게 바람직하다고 보는 거죠. 승가를 어떻게 볼 것인가에 대해서는 여전히 많은 논란이 있고 정리가 되지 않은 상태지만, 여러 가지 본의를 맞춰봤을 때 그렇게 해석하는 것이 맞고, 또 바람직하다는 게 제 생각입니다. 이 승가가 삼보륜의 세 번째 점이고, 승보입니다. 
정리해보면 삼보륜은 원상으로 표현된 존재의 본래면목, 인생의 본래면목을 역사 속에서 구체적으로 실현했다, 실현하고 있다, 앞으로도 실현해갈 것이라는 의미를 담은 거죠. 다시 말하면 진리를 구현한 역사, 구현하고 있는 역사, 구현해갈 역사를 이 삼보륜에 담은 겁니다.
 
 
이제 세 번째 그림을 볼까요?
 
03 인드라망무늬.jpg
 
앞에 나온 일원상이나 삼보륜보다 훨씬 구체적이고 사실적이죠? 여기에도 같은 것이 있는데, 바로 일원상이죠. 일원상은 존재의 참모습을 보여주는 원형이고요. 그리고 부처님은 누구인가, 세상은 이렇게 생겼어, 인생은 이런 거야, 하는 것을 훨씬 더 사실적으로 표현한 거죠.

 
자, 다시 법성게로 돌아가볼까요?
오늘 법회에서 함께 부른 노래가 <마음이 부처라면>이었죠? ‘마음이 부처’라는 말을 들으면 무슨 생각이 듭니까? 지금 이대로 내가 부처구나, 하는 생각이 드세요? 그런 마음이 빨리 안 들죠? 뭔가 다른 게 있을 것 같죠? 그런데 부처님은 계속 이야기를 하고 있는 거예요. 지금 이대로 부처라고.

마음이 나를 떠나서 따로 있을 것 같습니까? 그런 마음을 어떻게 알 수 있죠? 부처님은 그런 마음은 없다고 알려주셨어요. 내가 곧 부처야, 당신이 곧 부처야. ‘나보다 이웃을 위하여 나를 버리고 마음을 비우며 사는 이가 부처라오.’ 지금 부른 노래도 그것을 알리기 위해 만들어진 거겠죠.
 
이런 이야기를 하면 불교를 모르는 사람들이 훨씬 더 잘 받아들이는 것 같아요. 이상하게도 불교를 믿는 사람들이 더 이해를 못하는데, 이상한 선입견들이 더 많아서 그런 것 같습니다. 미리 어떤 선입견을 갖고 공부를 하기 때문에 공부를 하면 할수록 불교로부터 멀어지게 되는 것 같아요. 법성게도 사실은 그렇게 해석되기도 하죠.
 
자, 이제 다시 그림을 볼까요?
● 존재의 실상이 천 년 전에는 저 그림과 달랐을까요, 같았을까요? (대중:같았어요)
● 지금도 그렇죠?(대중:네),
● 그럼 천년후에는요. (대중:같습니다)
그렇죠. 천년 전이든 천년 후든 인생은 저런 모습이겠죠? (대중:네)
경전에서도 존재의 참모습에 대해 과거에도 그러했고 현재에도 그러하며 미래에도 그러하다고 표현하고 있죠.
 
자, 이제 여기에서 퀴즈 하나 내겠습니다.
지금가지 이야기한 것으로 본다면 죽음은 있는 것입니까, 없는 것입니까? (대중:…)
 
상식과 논리를 갖고 잘 생각해보세요. 금방 그랬잖아요.
● 존재의 참모습은 과거에도 저렇게 생겼고, 지금도 저렇게 생겼고, 미래에도 그렇게 생겼다면서요? (대중:네)
● 그러면 죽음이 있어요, 없어요?(대중:없습니다)
● 정말 그렇게 생각하세요? 그러면 벌벌 떨어야 할 이유도 없잖아요. (웃음)
 
어떻든 논리적으로는 존재의 참모습, 생명의 참모습에는 죽음이 없는 거죠?
과거에도 그러했고 현재에도 그러하며 미래에도 그러하니까요. 그렇죠? 그런데 지금 우리 사회가 몽땅 벌벌 떨고 있잖아요. 마치 있지도 않은 도깨비를 만들어놓고 벌벌 떠는 것과 같아요. 이런 걸 불교에서는 전도몽상이라고 하죠.
 
자, 우리의 참모습은 저렇게 생겼어요. 자, 사실은 나는 저렇게 생겼어. 아까 원상으로 표현하고 저 내용을 삶속에 구현하는 것을 삼보륜을 표현하고 저 내용을 잘 알도록 하는 것을 인드라망무늬라고 표현했는데, 저게 누구라고 했어요? 존재의 진면목, 나의 진면목, 인생의 진면목… 큰 스님 법문 들어보면 늘 그런 말씀들 하시잖아요. 인생의 진면목을 깨달아야 한다고. 다른 표현으로 인생의 본래면목이라고도 하죠.
 
지금까지 이야기는 인생의 진면목, 본래면목은 실제로는 무한하고 영원한 존재라는 이야기였어요. 생사가 없다는 말이죠. 그러면 도대체 무엇이 있는 것일까요? 변화가 있는 거죠.
 
 
자, 바다를 상상해보실까요?
바다가 바람이라는 인연을 만나게 되면 물결이 일어요. 그게 파도죠. 파도가 나타났다가 사라졌어요.
 
● 자, 파도가 나타나는 것을 파도가 태어났다고 볼 수 있을까요?(네)
● 그러면 파도가 사라진 것을 파도가 죽었다고 볼 수도 있겠네요?(네)
● 자, 그러면 파도가 생겨났다가 사라지는 것을 바다가 태어났다가 죽었다고 볼 수 있나요?(아니요)
그러면 어떻게 봐야 될까요? 바다가 놀고 있다고 봐야죠.
주어진 인연에 따라 파도가 나타나기도 하고 파도가 사라지기도 하고…
우주 전체로 보면 우리 인간도 마찬가지죠. 모든 생명이 마찬가지예요. 인간이 태어났다가 죽는 것도 이 파도와 같은 거죠. 그 자체로 보면 우리가 생각하는 태어남과 죽음은 존재하지 않는 거예요.
 
그러면 태어남과 죽음은 언제 어떻게 존재하는가.
이 그림을 봅시다. 가운데는 사람, 즉 각자 자기 자신이죠. 일원상과 더불어 전체로 보면 여기 이 사람은 과거에도 이런 모습이고 현재도 그러하며 미래에도 그러하겠죠?(네) 태어남과 죽음이 없어요. 생사가 없는 거죠. 항상 이 모습이죠.
그런데 이 사람만 딱 떼어놓고 보면 어떤가요? 저를 예로 들어보면, 저는 60여 년 전 태어났어요. 그리고 아무리 오래 산다고 해도 100년이면 끝나겠죠. 죽는 거예요. 그러니까 분리시켜서 보면 태어남과 죽음이 있는 거죠.
 
그런데 이 세상에는 분리될 수 있는 것이 없다고 했어요. 온통 함께 가고 있는 거죠. 분리될 수 있다는 것은 우리 생각일 뿐이죠. 예를 들어 바다가 인연에 따라 파도가 생겨나기도 하고 사라지기도 하는데 바다와 파도를 분리시킬 수 있겠습니까? 없죠? 파도만 떼어놓고 보면 시작과 끝이 있죠. 그러나 파도는 결국 바다인 거예요. 바다가 인연 따라 노는 게 파도잖아요.
 
이와 같이 이 세상은 온통 정신적이든 육체적이든 심리적이든 영혼이라고 하든 어떤 존재도 나눌 수가 없어요. 나눌 수 있다, 분리될 수 있고 생각하는 것이 바로 전도몽상이고 망상이예요. 분리시키는 순간 여러 가지 문제가 생기는 거에요. 죽음이 생기고 태어남이 생기고, 나와 너가 생기고, 시시비비꺼리가 생기고, 불안과 공포가 생기는 거죠.
 
저 그림을 다시 보세요. 저게 존재의 참모습이고 나라는 것을 잘 이해하고 관찰하면 죽음에 대해 불안과 공포에 떨어야 할 이유가 없겠지요? 세계의 본래면목은 공간적으로 무한하고 시간적으로 영원합니다. 인생의 본래면목도 그러하고 나의 본래면목도 그러합니다.
그런데 허깨비에게 벌벌 떨고 있으면 사람들이 어떻게 볼까요?
“저 사람 바보 아냐?” 그러겠죠?(웃음)
법성게는 내용이 아주 압축되어 있어서 어렵게 느껴지지만, 일원상, 삼보륜, 화엄인드라망무늬와 연결시켜서 잘 관찰해보면 쉽게 이해할 수 있고 대단히 탁월한 내용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오늘은 여기까지 할까요? 결론을 내봅시다.
죽음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우리 당당하게 불안과 공포에 휘말리지 말고 한 여름을 살아갑시다.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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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상사님의 댓글

실상사 작성일

게시물을 검색해보니 <화엄경 세주묘엄품> 이후 2년 넘게 보현법회 법문을 올리지 않았네요.
그 사이 즉문즉설도 있었고, 화쟁순례도 다녀오셨고,
그리고 달마대사 이입사행론 강의도 있었어요.
언제 기회가 되면 그 내용들은 정리해야 할 것 같습니다.

법문 올리기를 요청해주신 분들께 죄송하고요.
앞으로는 빠지지 않고 잘 올리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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