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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현법회 | [법성게강의] 참모습대로 살아가는 마음을 낼 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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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실상사 작성일15-09-13 21:15 조회3,028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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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08-16_보현법회


참모습대로 살아가는 마음을 낼 때


1.
안녕하세요? 이제 삼복이 지나서 좀 살만한가요? 옛 스님들 어록에 보면 다음과 같은 내용이 있습니다. 어느 날 법을 구하는 제자가 조실스님께 ‘온 세상이 불타는 집 속처럼 무덥고 고통스러운데 이럴 때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하고 물었습니다. 조실스님이 즉각 ‘더위 한 가운데로 들어가라’하고 대답합니다. 더위 한가운데에 해결책이 있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더우면 해결책을 어떻게 강구합니까? 너나없이 대부분 ‘해운대에 가야 된다’, ‘설악산에 가야 된다’, ‘제주도에 가야 된다’, ‘히말라야에 가야 된다’, ‘티벳을 가야 된다’하고 대책을 세웁니다. 실제 그렇게 하면 어떤가요? 좋은 해결책이 되던가요? 잠시는 조금 좋은 것 같죠? 그런데 실제로는 문제가 해결되지 않습니다. 어쩌면 오히려 또 다른 갈망만 더 생기지요. 그럼 어떻게 해야 할까요? “더위 한 가운데로 들어가라. 그곳에 해답이 있다. 그곳에서 해답을 찾아라”하고 가르치는 것이 불교이고 그 속에서 해답을 찾고 삶을 살아가는 사람이 붓다입니다.

하지만 대부분의 불교인들도 더위를 피해 해운대, 히말라야, 티벳, 인도, 설악산을 가는 방식으로 해결책을 찾습니다. 그리고 더 좋다는 것을 찾아 동서남북으로 열심히 쫓아다닙니다. 할 때마다 좋아지는 것 같은데 얼마 안가서 또 다시 제자리입니다. 끊임없이 시간과 공간, 그리고 형식은 다르지만 내용은 비슷한 삶을 되풀이 하는 것이 중생들의 삶, 또는 미혹된 사람의 삶입니다.

조금 전에 세월호 생존자 가족 분들이 오셨더라고요. 여기서 천일기도 한다는 이야기를 듣고 가끔 오시는 것 같아요. 진도를 오가시는 도중에 들여다보곤 하시는 것 같습니다. 점심도 드시고 차도 한 잔하고 가시라니까 일정상 그럴 여유가 없다고 하시네요.

세월호 사건으로 자식을 잃고, 친구를 잃고, 형제를 잃고 한없는 고통과 슬픔을 겪고 있습니다. 그런데 만약 세상을 떠난 그 부모가, 또는 그 아이들이, 그 친구가, 그 형제가 지금 내 눈 앞에는 없지만 2015년 8월 16일, 오늘 우주와 지구 어디에선가 또 다른 모습과 내용의 삶을 우리와 함께 하고 있다면 어떻겠습니까?

지금 그들이 내 눈 앞에 보이지 않고 또 그들과 직접 만나서 대화를 하거나 소통을 할 수는 없지만, 그렇더라도 이 시대, 이 지구상 어딘가에서 또 다른 모습과 내용으로 함께 하고 있다고 한다면 어떨 것 같습니까? 그 존재가 영원히 사라졌어, 우리의 관계가 영원히 끝났어, 이렇게 알고 믿는 경우하고, 반대로 어떤 형태로든 우리는 늘 함께 하고 있어, 이렇게 알고 믿는 경우, 그 아픔과 슬픔, 또는 그 문제를 바라보는 우리의 태도, 그 문제를 안고 살아가는 우리의 삶의 내용이 같겠습니까, 다르겠습니까? 확실히 다르죠?
 
무한한 우주 공간, 영원한 시간 속 어딘가에 어떤 형태로든 우리가 실제로 함께 하고 있다고 이해하고 확신한다면 아마 그 슬픔과 고통의 무게가 훨씬 줄어들고 더 나아가서는 없을지도 모릅니다. 또 우리가 그 문제를 품어 안고 살더라도 지금 여기에서의 삶을 훨씬 더 의미 있고 가치 있게, 더 멋지고 열정적으로 가꿔갈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듭니다.

아까 ‘더울 때 어떻게 해야 할까요?’하는 물음에 더위 한 가운데로 들어가야 해답을 찾을 수 있다고 했습니다. 그렇습니다. 해답이 그 곳에 있습니다. 그 문제 한 가운데가 아닌 그 어디에도 해답이 있지 않습니다. 그 한 가운데를 떠나서 다른 어디에서 해답을 찾으려 하는 것은 어리석을 짓일 뿐입니다. 부질없는 헛고생 일뿐입니다.

지금 우리가 겪고 있는 인간을 정말로 괴롭고 고통스럽게 하며 불행하게 만드는 죽음의 문제, 이 문제도 우리가 실상을 잘 못 알고 있기 때문에 생겨나는 겁니다. 실제는 우리가 보통 생각하듯이 시작으로써의 태어남도 있지 않고 끝남으로써의 죽음도 있지 않습니다. 인생은 태어나면서 시작되고 죽으면서 끝나는 거라고 알고 믿는 것은 우리들의 무지와 착각의 산물 일뿐입니다. 달리 이야기하면 어리석고 부질없는 망상인거죠.

실제로는 어떨까요. 끊임없이 변화하는 삶, 변화된 삶만 있습니다. 내 앞에 있다가 보이지 않게 되기도 하고, 여기에 있다가 어디에 갔는지 알 수 없게 되는 등 끊임없이 변화하는 활동이 있을 뿐 우리가 생각하는 것처럼 80년 전에 태어나면서 시작되고 80년 후에 죽으면서 영원히 끝나버리는 그런 삶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사람들이 그렇게 생각하는 것은 어리석고 잘 몰라서 그렇습니다. 사람들이 태어나면서 시작되고 죽으면서 끝난다고 알고 믿기 때문에 태어나는 것은 좋은 것이고 죽음은 나쁜 것이라고 생각하는 겁니다. 거기에 사로잡혀 벌벌 떨기도 하고 또 좋아서 펄쩍뛰기도 하잖아요. 모두 실제에 대한 무지와 착각 때문에 생긴 문제입니다. 인간사 문제들이 대부분 무지와 착각으로 만들어졌습니다.

우리가 공부하는 법성게 내용은 제가 하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우리가 좋아하는, 인류 역사상 최고의 스승이라고 하는 부처님의 말씀, 그리고 최고의 경전인 화엄경 말씀입니다. 그 부처님의 말씀을 실제에 적용해서 잘 관찰해보면 있는 그대로를 말로 설명하는 것이지 문득 떠오르는 생각을 말하는 것이 아님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그냥 실제와 관계없이 생각난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마치 목마를 때 물마시면 목마름이 해결되는 것과 같은 실제를 말하는 겁니다. 목마를 때 물 마시면 목마름이 해결되는 것은 생각이 아니고 실제잖아요. 이 사실은 실제이기 때문에 시비논란이 있을 수가 없어요. 동서고금, 남녀노소, 기독교든 불교든, 진보든 보수든 그 누구도 목마를 땐 물 마신다, 물마시면 목마름이 해결된다는 사실은 논란거리가 되지 않습니다. 그것 가지고 싸우는 경우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누구나 경험할 수 있고 언제든지 검증되는 실제의 사실이기 때문입니다. 그 실제의 내용을 아주 압축적으로 설명해 놓은 것이 법성게입니다.


2.
자, 그러면 법성게를 한 번 보죠. 다시 35쪽입니다. ‘법성게’라는 말을 우리말로 풀어 ‘노래하네, 그대의 삶을’이라고 했습니다. ‘여기 한 사람 있으니.’ 이 사람은 각각의 여러분, 즉 자기 자신일 수도 있고 또는 세월호 사건으로 인해 저 세상으로 떠나 간 분들, 그 친구들일 수도 있습니다.
 
첫 구절을 다시 한 번 보겠습니다.

‘여기 한 사람이 있으니 그의 본래 참모습은

온 우주 두루두루 어울려 나뉘어 진적 없고.’

먼저 거짓된 모습이 어떤 것인지 짚어 보겠습니다. 무지와 착각으로 이루어진 거짓된 모습은 ‘너는 너고 나는 나일뿐이라고 알고 믿는 모습’, ‘태어나면서 인생이 시작되고 죽으면서 끝난다고 알고 믿는 모습’입니다. 우리는 대부분 그렇게 알고 믿고 있잖아요. 이것을 불교의 언어로 이야기하면 무지와 착각에 사로잡혀서 인생을 살고 있다, 또는 전도몽상에 빠져서 살고 있다고 표현합니다. 반대로 그의 본래 참 모습은 어떤가. 너에 의지해 내가 있고 나에 의지해 네가 있는 모습 또는 온 우주 두루두루 어울려 한 번도 나뉘어 진적 없는 모습입니다. 이 사실은 산 자와 죽은 자, 또는 만나고 헤어진 자가 한 손의 손바닥과 손등처럼 연결되어 있다는 이야기입니다. 공간적으로 한 번도 분리, 단절 되어서 따로따로 인적이 없다는 겁니다. 그것은 살아 있을 때나 죽은 후에도, 여기서도 저기서도 그렇다는 이야기입니다. 죽어서도 따로 따로 분리된 적이 없고, 살아서도 따로따로 분리된 적이 없습니다. 또 다르게 이야기하면 살아 있을 때라고 해서 한 덩어리로 붙어있고 죽었다고 해서 완전히 따로따로 분리되어 영원히 끝나는 것이 아니라는 이야기입니다.


‘긴긴 세월 흐르고 흘러도 언제나 항상 그 모습이며.’

공간적으로만 그런 것이 아니라 시간적으로도 분리된 적이 없다는 것입니다.
과거에도, 현재에도, 미래에도 계속 그렇다는 이야기입니다.


‘본래 정해진 이름도 없고 따로 떨어진 모습도 없으니.’

모든 것은 인연 따라, 또는 필요에 따라 온갖 이름으로 불리는 거예요. 너라고도 하고, 나라고도 하고, 살았다고도 하고 죽었다고도 하고 만났다고도 하고 헤어졌다고도 하고 여기 있다고도 하고 멀리 떠났다고도 하고 남자라고도 하고 여자라고도 하고 부모라고도 하고 자식이라고도 하고 인연 따라서 또는 필요에 따라서 이런 저런 이름으로 표현하는 겁니다. 부처님의 이름도 정해진 것이 없어요. 인연이 주어지면, 또는 어떤 필요가 생기면 이런 이름을 붙여도 되고, 저런 이름을 붙여도 되는 것이죠.


‘오로지 실천하는 지혜로 알 뿐 다른 길 있지 않네.’

사실에 대해서는 오로지 경험해 봐야만 압니다. 예를 들어서 ‘여기 대단히 훌륭한 분, 거룩한 분’이라고 소문이 자자한 분이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그렇다고 알고 믿습니다. 그런데 어떤 인연, 또는 어떤 상황에 의해서 이 사람이 거짓말을 했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될까요? 그가 누구이든 거짓말을 하는 순간 그 사람은 그냥 거짓말 하는 사람일뿐인 거예요.

인간이란 행위 하는 대로 되는 존재입니다. 어떤 이름으로 규정을 해 놓아도 또는 어떤 모양으로 꾸며 놓아도 다 부질없는 거예요. 부처라고 이야기하든, 중생이라고 이야기하든, 아름답다고 이야기하든, 추하다고 이야기하든, 어떤 이름을 붙여놔도 행위 하는 대로 됩니다. 속으로 미운 마음을 가지면 즉각 미워하는 인간이 되고 입으로 욕설을 퍼부으면 바로 욕하는 사람이 되는 거예요. 아무리 멋지게 꾸미고 이름을 붙여 놓아도 소용없습니다. 확실한 것은 즉각즉각 행위 하는 대로 이루어지는 것이 인간이라는 겁니다. 그렇기 때문에 입으로 하든, 몸으로 하든, 마음으로 하든 자신이 행위 하는 대로 되는 거예요. 그리고 그것은 직접 해보면 바로 알 수 있습니다. 겪어보지 않고는 제대로 알 수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오로지 실천하는 지혜로 알 뿐 그 밖에 다른 길이 있지 않네’라고 한 것입니다.

여기까지, 네 구절 안에 법성게를 통해 말하고자 하는 것을 총론적으로 다 설명하고 있습니다. 이 네 구절 속에 우리가 알아야할 것, 두 가지가 다 담겨있습니다.

하나는 ‘나는 누구인가? 인생이란 무엇인가? 생명이란 어떤 존재인가?’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어떻게 살아야 할까? 어떻게 살아야 삶이 행복해질까?’하는 것입니다. 어쩌면 우리가 알아야 할 내용은 이 두 가지를 벗어나지 않습니다. 법성게는 이 질문에 대한 답을 아주 압축적으로 설명하고 있죠. 하나는 내용을 잘 알아야 한다는 이야기이고, 다른 하나는 구체적으로 실천해야만 된다는 이야기 입니다.

다시 말하면 인생이 무엇인가에 대해서 알아야 한다는 것이고, 또 안 내용대로 실천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앎과 실천이 일치하는 사람을 부처라고 부릅니다. 앎과 실천이 일치되도록 하는 노력을, 붓다의 삶을 사는 수행이라고 이야기하는 거죠. 그것을 여래십호(如來十號)에서는 명행족(明行足)이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명(明)’은 안다는 뜻이고, ‘행(行)’은 안 내용대로 실천한다는 뜻입니다. 아는 것과 실천하는 것이 구족한 이, 앎과 실천이 원만 구족한 이, 아는 대로 실천하는 사람, 앎과 실천이 일치되는 삶을 사는 사람, 그를 바로 붓다라고 하는 것입니다.


3.
그 다음에는 앞에서 총론적으로 설명한 내용을 좀 더 자세하게 구체적으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먼저 공간적으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의 본래 참모습은 지극히 심오하고 미묘하여 자신을 고집하지 않고 인연 따라 온갖 모습을 이루니, 하나 안에 일체가 깃들고 여럿 안에 하나가 깃들며 하나가 그대로 일체요, 일체가 그대로 하나이며 한 먼지가 온 우주 품어 안고 온갖 먼지들도 또한 그러하네.’


다음은 시간적인 이야기예요.

‘끝없는 영원의 시간이 그대로 지금 여기 한 순간이요, 지금 여기 한 순간이 그대로 끝없는 영원의 시간이며 과거‧현재‧미래 모든 시간들과 지금 여기 한 순간이 함께 있어도 혼란스럽지 않고 질서정연하게 시간마다 따로따로 이루어지네.’

이 내용은 앞서 보았던 ‘온 우주 두루두루 어울려 한 번도 나뉘어 진적 없고 긴긴 세월 흐르고 흘러도 언제나 항상 그 모습이며’ 이 말에 대한 구체적인 설명입니다.


이 이야기를 세월호와 연결시켜 다시 생각 해 봅시다. ‘그의 본래 참 모습은 지극히 심오하고 미묘하여 자신을 고집하지 않고 온갖 모습 이루니, 하나가 그대로 일체요, 일체가 그대로 하나’이며 내가 곧 우주요, 우주가 곧 나라는 이야기입니다. 내가 곧 너이고, 네가 곧 나라는 이야기이기도 합니다. 시간적으로도 마찬가지이고요.

그러면 세월호 인연 때문에 이승에서 저승으로 떠난 사람, 찬우를 예를 들어 보겠습니다. 법성게 사고로 보면 찬우라는 아이가 곧 우주고, 우주가 곧 찬우입니다. 그런대도 17년 전에 찬우라는 한 아이가 하늘에서 별 떨어지듯 새롭게 시작했다가, 17년 만에 찬우의 인생이 뚝딱 끝나 버렸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법성게의 내용처럼 실제 공간적으로 보았을 때 우주가 곧 찬우고, 찬우가 곧 우주이며 시간적으로 영원이 곧 찬우이고 찬우가 곧 영원인데도 시작과 끝이 있다고 할 수 있을까요? 우리 대부분은 그렇게 생각합니다. 그런데 실제는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어떤 형태로든 끊임없는 변화는 있지만 우리가 생각하는 것처럼 시작과 끝은 없습니다. 찬우가 곧 우주고, 우주가 곧 찬우라고 한다면 우리가 생각하는 것과 같은 죽음, 끝남의 의미로써의 죽음, 영원히 끝난다, 영원히 이별한다, 영원히 사라진다는 의미의 이별은 있을 수가 없는 거죠. 영원한 끝남, 영원한 이별, 영원한 떠남이라고 하는 것은 무지와 착각의 관념으로 만들어진 망상입니다. 인간이 지어내는 이런 망상을 불교는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라고 합니다. 자기 마음대로 해석하고 만들어놓고 거기에 사로잡혀 있는 거예요. 그것을 자승자박(自繩自縛)이라 할 수 있죠. 스스로 감옥을 만들고 스스로 감옥에 갇힌 꼴입니다.


‘참모습대로 살아가는 마음을 낼 때
바로 그 순간 그대로 정각(正覺)이니.’

이 구절은 화엄경 또는 법성게의 ‘초발심시변정각(初發心時便正覺)’을 풀어낸 것입니다. 참모습대로 살아가는 것이란 어떤 겁니까? 태어나면서 시작되고 죽으면서 끝나 버리는 것, 그것은 거짓된 모습입니다. 그런 것은 생각으로만 있는 것이지 실상으로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거짓된 모습에 현혹되어서 살아갈 것이 아니라 참모습대로 살아가야 한다는 겁니다.

‘참모습대로 살아갈 마음을 낼 때’ 이것을 ‘초발심’이라고 합니다. 달리 표현하면 ‘깨달음을 실천하겠다’는 말이죠. 이 마음이 ‘초발심’, 첫 마음인거죠. ‘정각(正覺)’은 참모습대로 사는 삶이 온전히 무르익어서 그것이 인격이 되고, 일상의 삶이 저절로 그 참모습에 맞게 이루어지는 상태를 표현한 단어입니다.

참모습대로 살겠다고 하는 첫 마음하고 그 마음이 무르익은 정각의 마음은 사실 내용이 같습니다. 다만 서툴고, 익숙함이 다를 뿐입니다. 내용은 다르지 않습니다. 전인격으로 실현되어 있느냐, 아니면 전인격으로 실현되지 않았느냐의 차이만 있는 거예요. 다른 예를 들어본다면 초발심자가 서툴게 먹는 실상사 밥이나 참모습대로 사는, 삶이 완전히 무르익은 부처가 익숙하게 먹는 실상사 밥이나 같다는 겁니다.


‘참모습 그 자리엔 생사와 열반이 항상 서로 어울려 함께 있고.’

우리는 생사를 버리고 열반의 세계로 가야한다고 배우고 익혀왔습니다. 따라서 생사와 열반이 따로 있다고 알고, 믿고 있는 거죠. 그리고 우리는 끊임없이 열반세계를 찾아서 동분서주하고 있습니다. ‘동분서주했는데 안 찾아진다’고 실망하고 절망하고 또 괴로워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의상스님은 생사와 열반은 떨어져 있지 않다고 말합니다. 마치 밤과 낮이 분리되어 있지 않듯이 같이 있는 것이라고 합니다. 밤과 낮이 따로따로 떨어져 있습니까? 어디까지가 밤이고, 어디까지가 낮이죠? 한 번 한계를 지어보세요. 시간으로 정해져 있을 뿐이지 실은 정확하게 구분할 수 없어요. 손바닥과 손등의 경계를 구분할 수 있겠습니까? 어디서부터 어디까지가 손등이고, 어디서부터 어디까지가 손바닥이라고 분명하게 경계 지을 수 없습니다.

생사와 열반이 어울려 있다는 이야기는 죽음이 곧 삶이고 삶이 곧 죽음이라는 이야기이기도 합니다. 내가 곧 너이고 네가 곧 나라는 이야기도 되고, 내가 우주이고 우주가 곧 나라는 이야기도 되는 거죠. 이것이 실제라는 겁니다. 이것이 실제라면 생사가 따로 있고 열반이 따로 있다고 알고 믿는 우리네 생각은 모두 망상인거죠. 전도몽상인 겁니다. 그래서 생사를 버리고 떠나서 열반을 이루겠다고 하는 것은 다 전도몽상 행위가 되고 마는 거예요. 우리는 생사를 떠나서 다른 어디서 열반을 얻는 것이 아니라 생사 그 자리에 서서 생사가 본래 없음을 앎으로써 열반의 삶을 살아야 하는 거죠.

아까 설명했던 대로 ‘내가 곧 우주고 우주가 곧 나다’, 그러므로 ‘우리가 생각하는 태어남과 죽음은 존재하지 않는다’, ‘끝없는 변화, 또는 변화된 삶이 존재할 뿐이다.’ 이렇게 정리를 하고 본다면 죽음에 대한 불안과 공포가 있겠습니까, 없겠습니까? 우리가 생각하는 죽음이라는 것이 없기 때문에 죽음에 대한 공포도 생길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죽음에 대한 불안과 공포가 없다면 생사 그 자리가 곧 편안한 자리가 되잖아요. 우리가 생각하는 생과 사는 본래 없으므로 이것을 제대로 이해하고 확신하면 죽음 때문에 불안과 공포에 떨어야 할 이유가 없습니다. 불안과 공포가 사라지면 편하잖아요. 편안하면 그게 뭐예요? 그것이 열반이에요. 이렇게 알고 이렇게 삶을 살아야 그것이 부처님 뜻에 맞는 참된 불교라고 이야기하고 있는 거죠.
 
‘참모습 그 자리엔 생사와 열반이 항상 서로 어울려 함께 있고,
숨겨진 본 바탕과 드러난 모습도 미묘하게 어울려 구별할 수 없으니.’

앞의 내용은 생사와 열반에 대한 것, 뒤의 내용은 숨겨진 본 바탕과 드러난 모습에 대한 것, 이렇게 두 가지를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이것도 역시 마찬가지로 분리할 수 없다는 것이죠. 이것은 형상과 그림자를 분리할 수 없는 것과 같습니다. 불교의 전문적 용어로는 ‘이(理)’와 ‘사(事)’라고 표현합니다. 이치와 현상이라는 이야기입니다. 숨겨진 본바탕은 ‘이’, 이치이고, 드러난 모습은 ‘사’, 드러난 사실, 현상을 말합니다.


‘그 경계는 깨달음을 실천하는 사람, 붓다와 보현보살의 몫이네.’

‘깨달음을 실천하는 사람’이란 참모습대로 살아가는 사람을 뜻합니다. ‘깨달음을 실천하는 사람, 붓다와 보현보살의 몫이네.’ 이것은 오직 몸으로, 입으로, 마음으로 실천하는 사람만이 알고 경험하게 된다는 이야기입니다. 결국 앎과 실천이라고 하는 이 두 가지를 이야기 하는 것입니다. 이 두 가지가 분리되거나 이 두 가지를 벗어나면 또 다른 전도몽상의 삶이 됩니다. 하나는 알아야 할 내용, 또 하나는 실천해야할 내용입니다. 여기까지가 알아야할 내용과 실천해야할 내용, 이 두 가지를 제대로 알아야 한다는 설명입니다.


‘붓다행 하는 용맹한 사람 능인은.’

능인(能仁)은 석가모니 부처님의 또 다른 이름이에요. ‘깨달음을 실천하는 용맹스러운 사람 능인은’, 이런 뜻입니다. 능인이라는 사람이 앞에 설명한 내용을 잘 알고 아는 대로 실천을 했어요. 아는 대로 실천을 해 보니까 거기에 인생의 해답이 있고, 그렇게 사니까 인생이 괜찮아졌다는 겁니다. 그것을 알고, 그렇게 산 사람, 그것이 석가모니 부처님입니다.

 

‘언제나 한결같은 그 자리에 서서’

이 구절은 공간적으로는 여기, 시간적으로는 지금, 그리고 본인이 직접 했다는 이야기입니다. ‘언제나 한결 같은 그 자리에 서서.’ 이것을 한자로는 ‘능인해인삼매중(能仁海印三昧中)’ 이렇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존재 그 자체에 직면했다는 의미입니다. 시간, 공간, 존재, 그 자체에 직면해서 거기서 한 걸음도, 더 나아가서는 털끝만큼도 벗어나지 않는다는 겁니다.


'뜻대로 하는 자유자재의 솜씨로'

‘뜻대로 하는 자유자재의 솜씨’는 ‘주체적’이라는 의미입니다. 주체적인 의도를 가지고 했다는 거죠.


‘보배를 허공가득 비처럼 내리게 하여.’

여기서 ‘보배’란 뭘까요? 이 세상 최고의 보배가 무엇이겠습니까? 이 세상 최고의 보배는 붓다의 팔만사천가지 법문입니다. 왜 법문이 보배일까요? 바로 지금 여기 우리에게 주어진 세 가지 시간, 공간, 그리고 본인, 다시 말하면 존재 자체가 갖는 궁극의 가치성에 눈뜨게 하고 이것을 제대로 활용하여 행복한 삶을 살도록 하는 내용이기 때문입니다. 주어진 것을 제대로 쓰느냐, 쓰지 않느냐는 오로지 본인에게 달려 있습니다. 공간을 평화적으로 쓰면 평화의 공간이 됩니다. 시간을 평화적으로 쓰면 평화의 시간이 되는 거예요. 본인 스스로를 평화롭게 쓰면 평화의 존재가 되죠.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닙니다. 평화의 공간이 되고, 평화의 시간이 되고, 평화의 존재가 된다면 그것이 보배 아닙니까? 그 보다 더 좋은 보배가 어디 있습니까? 천금, 만금을 준다고 한들 바꾸겠습니까? 능인이라는 사람, 석가모니라는 사람은 그렇게 알고 그렇게 행하며 삶을 살았다는 거예요. 그렇게 하니까 어떻게 되는가.


 
‘사람들마다 준비한 그릇만큼
 온갖 종류의 이익을 얻어가게 하네.’

그렇게 하니까 본인도 좋았지만 모든 생명들에게도 유익했다는 이야기입니다. 그 혜택을 누가 받고 있습니까? 바로 오늘 우리들이 받고 있는 거예요. 석가모니가 그것을 알고 삶을 그렇게 잘 살고 또 사람들에게 그 내용을 알리기 위해 온갖 가르침을 펼치지 않았더라면 오늘 이 순간 우리가 법성게를 만날 수 없는 거죠. 오늘 이 순간 우리가 법성게를 만나고 이렇게 이야기를 나누지 않았더라면 ‘인생은 태어나면서 시작되고 죽으면서 끝나는 거야’ 이런 전도되고 허망한 지식과 믿음을 가지고 인생을 살게 되는 거지요. 따라서 불안과 공포에 늘 시달리고, 거기서 벗어날 길이 없는 거예요. 그런데 우리는 법성게를 만남으로 해서 생사와 열반이 함께 있다, 우리가 알고 있는 생과 사는 관념일 뿐 실제로는 그렇게 존재하지 않는다, 실제 끊임없는 변화가 있을 뿐 시작과 끝이 본래 없다는 것을 알게 된 거잖아요. 따라서 자연스럽게 편안하고 자유롭고 여유롭게 되죠. 사실 이보다 더 좋은 이익이 떠 있을까요? 있을 것 같지만 실제로는 없습니다. ‘온갖 종류의 이익을 얻어가게 하네’는 바로 석가모니 부처님의 일상 삶을 묘사한 것입니다.

오늘은 여기까지만 해야겠습니다. 다음 시간이면 끝나겠네요. 지난 시간까지는 알아야 될 내용에 대한 설명이었습니다. 오늘은 능인이라고 하는 실제 인물이, 석가모니라고 하는 역사 속에 살았던 구체적인 한 인간이 이 내용을 알고, 그대로 삶을 살았고, 살아보니까 정말 괜찮았다고 하는 이야기를 했습니다.

부처님은 증명되지 않은 것은 이야기하지 않았어요. 지금 여기서 바로 이해가 되고 바로 이루어지고 바로 검증되는 것만 이야기 했어요. 그렇지 않으면 이야기 하지 않았어요. 몰라서가 아니라 알았다 하더라도 이야기 하지 않았어요. 왜 그랬을까요? 사람들에게 도움 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석가모니는 사람들에게 도움이 되는 내용만 이야기했습니다.

그 도움 되는 내용을 본인이 해 보니까 좋더라. 책에서 본 것도 아니고 누구한테 들은 이야기도 아니고 혼자 상상해 낸 것도 아니고 ‘실제 살아보니까 좋더라’라고 이야기 한 거예요. 이것이 일반적인 지식과 다른 부분입니다. 경전의 언어는 실제 삶에서 실현되어 질 수 있는, 경험되어 질 수 있는 내용을 언어로 표현한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제대로만 해석하면 누구나 바로 이해하고 바로 실현할 수 있고 바로 증명할 수도 있습니다. 만약에 이해가 안 된다, 실현이 안 된다, 검증이 안 된다고 하면 우리가 뭔가 잘못 해석하고, 잘못 다루고 있는 셈인 겁니다.

혹 그렇지 않은 경우가 있다면 오랜 역사 속에서 이해할 수 없는, 현실에서 실현될 수 없는, 증명될 수 없는 다른 내용이 끼어들어 온 거예요. 부처님은 바로 이해되는 것, 실현되는 것, 검증·증명되는 것만 이야기 했어요. 그래야만 사람들에게 이익이 되기 때문이죠. 사람들에게 도움이 되지 않는 것, 이익이 되지 않는 것은 비록 알고 있다 하더라도, 그것이 실제라 하더라도 말하지 않았어요. 그래서 석가모니, 붓다 능인이 그렇게 알고 그 내용대로 살아보니까 괜찮더라, 나도 좋고 세상에도 좋더라, 내 인생도 괜찮아졌지만 세상을 좋게 만드는 데에도 효과적이더라, 그래서 사람들에게도 함께 하자고 그 내용을 말한 것입니다. 오늘은 여기까지 하겠습니다.


4.
세월호 사건은 세월과 함께 잊혀져가는 중이기도 하고 기억하는 것이 고통스러우니까 잊고 싶어 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그렇다 하더라도 그것은 우리에게 던져진 가장 큰 슬픔, 큰 아픔, 큰 고통, 어쩌면 가장 중요한 화두입니다. 그런 아픔들, 그런 슬픔들, 그런 화두들이 우리 역사 속에 무수하게 있었습니다. 다만 그 중 우리가 가까이 경험한 것이 세월호 사건인거죠.

중요한 것은, 전라도 사람들은 그것을 대단히 슬퍼했는데 경상도 사람들은 슬퍼하지 않았다거나 경상도 사람들은 대단히 아파했는데 전라도 사람들은 아파하지 않았다거나 여권 사람들은 중요하게 생각했는데, 야권 사람들은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았다거나 하는 문제라면 사실 우리가 특별히 중요하다고 이야기 할 수 없어요.

그런데 세월호 사건은 모두가 함께 슬퍼하고, 모두가 함께 아파했습니다. 우리 사회에서 아주 극단적으로 대립하는 개념이 수구꼴통, 종북좌파 이런 거잖아요. 세월호 사건이 벌어진 초기엔 수구꼴통도 종북좌파도 다 같이 아파하고 슬퍼했습니다. 온 국민이 세월호 사건을 중요하다고 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세월호 문제를 수준 높게 잘 풀어내느냐 그렇지 못하느냐에 따라서 우리 개인의 삶과 우리 사회의 수준과 미래가 좌우되게 되어 있어요. 우리 삶의 질적 내용이 좌우된다는 거죠. 여기에 머물지 않고 온 국민이 함께 하는 그런 마음으로 세월호 문제를 잘 풀어내어 값지게 하면, 그 지혜와 그 마음, 그 힘으로 우리 사회, 우리 가족의 모든 문제도 잘 풀어내는 출발점, 힘이 될 수 있습니다.

요즘 우리는 통일만이 희망이라고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여야가 다 같이 이렇게 이야기를 하고 있어요. ‘통일대박’이라는 말이 나오기도 하고요. 세월호 문제를 온 국민이 함께 했던 그런 마음에 부합되도록 풀어낼 수 있다면 통일문제를 비롯한 다른 문제를 풀어내는 길도 그곳에서 열릴 수 있습니다.

그런데 남북문제를 풀겠다, 한국사회 문제를 풀겠다고 하면서 가장 절실한 세월호 문제는 과거에 그랬던 것처럼 다룬다면 문제를 풀어낼 수 있는 길도 찾을 수 없고 힘도 나올 수 없어요. 예전처럼 구태의연하게 끝없이 편갈리어 서로 공방만 되풀이하고 온 국민을 분열시키고 결국 승부게임으로 처리하는 방식으로 이 문제를 다루는 한 한국사회 문제를 풀어낼 길도 없고 힘도 나올 수 없습니다. 우리 수준이 이정도인데 다른 문제를 희망적으로 풀어낼 길과 힘이 나올 수 있겠습니까? 나올 수 없습니다.

많이 늦어지긴 했지만 길이 없는 것은 아닙니다. 불가능하지도 않고요. 어떻게 하면 세월호 문제를 정말로 온 국민이 함께 했던 그 마음에 부합할 수 있도록, 부응할 수 있도록 풀어낼 수 있을까요? 그렇게 한다는 것은 곧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이 변화한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하고 한국사회가 새로워지는 것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한 사람, 한 사람이 인간적으로 훨씬 더 성숙되어지고 훨씬 더 품위 있어지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또한 한국사회도 한 단계 더 성숙되어지고 더 품격 있는 사회로 새롭게 태어난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그래서 지난 번 한겨레에 글 쓰면서 그렇게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하고 고민했습니다. 그 때 원효의 삶을 소설로 쓴 <발원>을 많은 사람들이 읽도록 하는 것이 중요하겠다는 생각에서 ‘<발원>을 읽자’고 글을 썼습니다. 지난번에 그 소설을 가지고 정목스님과 김선우 작가가 나와서 북 콘서트를 했어요. 다 좋았다고 하고 내용도 괜찮았습니다. 그런데 그것을 보면서 뭔가 아쉬웠어요. ‘요석 그리고 원효와 세월호의 기적’, ‘요석 그리고 원효와 세월호의 희망’ 이런 식으로 이야기를 진전시켰으면 더 좋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이제는 분노와 증오 없이, 불안과 공포 없이 아픈 기억을 값지게 할 수 있는 길이 뭘까. ‘내가 달라질게’, ‘대한민국이 달라지도록 할께’라고 아이들에게 약속한 것을 어떻게 실현하도록 할 것인가. 약속한 내용이 우리 사회에 어떻게 구현되도록 할 것인가. 어떻게 값지게 하는 일을 만들어 낼 것인가. 여기에 국민적 관심과 지혜를 모아내도록 하는 것이 중요하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요석 그리고 원효와 세월호의 기적’, 또는 요석 그리고 원효와 세월호의 ‘희망’, ‘꿈’, ‘소망’이라고 할 수도 있을 겁니다. 이런 이야기에 대중적 관심을 갖도록 콘서트를 곳곳에서 펼쳤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제가 광주에 갔다가 천일 순례하는 ‘시민상주모임’ 사람들에게 그 제안을 했더니 순간적으로 깜짝 반가워하는 거예요. 대환영인거예요. 지역 곳곳에서 이러한 활동이 꼭 필요하다며 바로 추진하자고 그러데요.

제가 그렇게 생각을 하게 된 계기는 정해신 박사의 이야기를 들었기 때문입니다. 그 분이 <발원>을 읽고 본인이 치유를 받았다는 글을 썼더라고요. 제가 글을 직접 보지는 못하고 이야기만 들었어요. 정해신 박사는 세월호의 상처를 전문적으로 치유하는 사람인데 그 과정에서 본인이 아픈 거예요. 그런데 <발원>을 읽고 굉장히 많은 치유를 받았다고 합니다. 그래서 ‘이것을 세월호와 연결시켜 이야기를 하면 좋겠구나’ 하는 생각을 했습니다. 광주에서 이 이야기를 했더니 ‘아! 좋다’고 했습니다. ‘곳곳에서 필요하다’고 했습니다. ‘일단 광주에서부터 한 번 시작해보자’고 했습니다. 하지만 정해신 박사는 집중해야할 일이 있어서 시간을 내어 움직이기 어려울 것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철학자 강신주씨가 같이 오면 좋겠다고 그래요.
 
세월호 이야기를 하는 것은 누구를 비난하자는 것도 아니고 누구를 괴롭히자는 것도 아닙니다. 그야말로 세월호 사건을 어떻게 값지게 할 것인가, 아이들에게 약속한 것처럼 어떻게 내 삶을 변화시킬 것인가, 우리 사회를 바꿀 것인가 하는 고민입니다. 그 길을 찾기 위한, 그 길을 만들어 가기 위한 국민적 지혜와 마음을 이끌어 내려는 겁니다.
 
광주에서는 좋다고 해서 일단 해보고 다시 판단하자고 했습니다. 혹시 우리 실상사에서 먼저 시작해보실래요? 어떻습니까? 저는 우리가 세월호 문제를 수준 높게 해결하는 것이 곧 내 인생의 수준을 높이는 길이고 우리 사회의 수준을 높이는 길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정말 지극정성으로 우리가 그렇게 할 수 있도록, 그렇게 될 수 있도록 노력을 해야 된다고 봅니다.
 
우리가 법성게를 공부하자고 했지만 공부 열심히 안 했잖아요. 솔직히 대충 대충하고 예습도 복습도 하지 않고, 나 혼자 떠들었잖아요. 그렇지 않은가요?(웃음) 그래도 세월호 문제를 정말로 제대로 풀어서 우리 삶의 수준을 높일 수 있도록, 우리 사회가 수준 높은 사회로 갈 수 있도록 노력을 한다면 법성게 공부는 대충대충 했지만 실제적으로는 제대로 공부한 것이라고 할 수 있을 것 같아요. 그렇게 노력하도록 하고 오늘 이야기는 여기서 정리하겠습니다.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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