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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현법회 | [법성게강의] 왜 계속 세월호 이야기를 해야 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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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실상사 작성일15-11-08 20:18 조회3,438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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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 9. 20 _보현법회 / 도법스님 법문

8월 보현법회 이후 한 신도님께서 질문을 해왔습니다.
"삶과 죽음이 둘이 아니라면서 왜 세월호에 대해 잊고 진정하자고 하지 않고, 계속 세월호 이야기를 들추는가... 그것은 법성게의 정신과 어긋나는 것은 아닌가" 하는 것이 골자였지요. 9월 법문은 그에 대한 대답을 중심으로 진행되었습니다.

 

왜 세월호 이야기를 계속 해야 하는가

 

1. 우리를 진정으로 기쁘게 하는 일은 무엇일까요?

안녕하세요?

올해는 대풍년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풍년이 들어도 별로 반갑지 않은가 봐요. 저도 그 소문을 오늘에서야 들은걸 보면 풍년 들었다는 소문이 온 동네방네 자자하게 나지는 않은 것 같습니다. 왜 그럴까요? 옛날에는 풍년이 들었다고 하면 온 세상이 기뻐하고 희망찼습니다. 그런데 올해는 역대 최고의 풍년이 들었다고 하는데도 우리 사회가 별로 기뻐하지도 않고 희망차지도 않은 것 같습니다. 이것은 보통 문제가 아닙니다. 온 세상이 기뻐해야 하고 온 세상이 희망차야 할 일이 현실로 이루어졌음에도 불구하고 크게 기쁨으로 받아들여지지도 않고 또 희망으로 받아들여지고 있지도 않습니다. 이런 현상을 어떻게 생각해야 할까요?

우리를 정말로 기쁘게 하는 것, 정말로 희망차게 하는 것은 따로 있는 것 같습니다. 풍년이 정말 기뻐하고 정말 희망찰 일이면 당연히 역대 최고의 풍년이 들었으니까 우리 모두가 기뻐하고 우리 모두가 희망차야 마땅합니다. 그런데 역대 최고의 풍년이 들었는데 도시 사람들은 말할 것도 없고 농사를 짓고 있는 농부들도 그렇게 큰 기쁨, 큰 희망으로 받아들이지 않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러면 우리를 기쁘게 하는 일은 뭘까요? 우리를 행복하게 하는 일은 뭘까요? 이 이야기를 우리가 해야 하고 그 해답을 찾아야 합니다. 그 내용을 만들어 내야 하는 곳이 절이고, 그 이야기를 만들어 내야 하는 주체가 불교인이며, 그 이야기를 하는 곳이 실상사 안에서는 법회 자리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정말 기뻐할 수 있는 내용, 정말 우리가 희망찰 수 있는 내용, 행복할 수 있는 내용이 풍년이 아니라면 무엇일까요? 부처님은 우리에게 그것이 무엇이라고 이야기하고 있을까요? 부처님이 가르치는 행복의 내용은 어떤 것일까요?

우리가 시주를 많이 하고 시주를 많이 해서 법당도 많이 짓고 탑도 세우고 불상도 모시고 스님들한테 대중공양(?)도 많이 내면 대단히 많은 복을 받아서 삶이 풍요로워지고 행복해 진다. 그러니까 복을 많이 짓자는 이야기를 많이 합니다. 물론 그렇게 하는 것도 복을 짓는 일이기도 하고 복을 받는 일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금강경에서는 그것보다 더 진짜 복 되는 일, 더 행복해지는 일이 있다고 말합니다. 금강경에서 이야기하고자 하는 내용을 아주 압축해서 표현한 것 중 대표적인 것이 사구게(四句偈)입니다. 사구게는 네 구절로 된 시라는 뜻입니다. 이 사구게에는 금강경의 사상과 정신이 압축해서 담겨 있습니다. 혹시 사구게가 뭔지 기억하고 계세요? 아시는 분 한 번 읊어주세요. 하하하. 우리 거사님, 아시는 것 같은데?

 

- 네.

범소유상(凡所有相)
개시허망(皆是虛妄)
약견제상비상(若見諸相非相)
즉견여래(卽見如來)

 

그렇죠. 보통 이것을 금강경 사구게라고 이야기 합니다. 또 금강경 마지막 부분에 일체유위법(一切有爲法)/여몽환포영(如夢幻泡影)/여로역여전(如露亦如電)/응작여시관(應作如是觀) 이것도 사구게라고 이야기해요. 하지만 앞에 이야기 한 것을 주로 사구게라고 하죠. 그러면서 소위 물질로 아무리 많이 보시를 했다고 하더라도 그것보다 더 큰 복이 되고 공덕이 되는 것은 금강경 사구게의 내용을 이야기 하는 것입니다. 즉 부처님께서 가르쳐 주신 법을 많은 사람들에게 전하는 것이 더 큰 공덕이 된다고 합니다.

이 이야기를 더 깊이 이해해보면 부처님 가르침대로, 부처님이 가르쳐준 대로 실천하는 것이 더 큰 복이 되고, 더 큰 공덕이 된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재물, 물질로 보시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것만 가지고는 충분하지 않다는 겁니다. 거기에 반드시 붙잡고 가야할 것이 법을 전하는 일, 법대로 실천하는 일입니다. 그래야만 태풍이 오면 오는 대로, 오지 않으면 오지 않는 대로 기쁠 수 있고, 행복해 질 수 있는 길이 나옵니다. 법을 알고 전하고 법대로 실천하면 태풍이 들면 드는 대로 우리가 기쁘고 행복할 수 있고 안 들면 안 드는 대로 기쁘고 행복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이야기한다면 그 핵심은 법을 알고 전하는 일, 또는 법대로 실천하는 일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2.  삶과 죽음이 둘이 아님을 아는 것

그동안 우리는 의상스님의 법성게를 가지고 한 달에 한 번 공부를 해오고 있습니다. 그 중 지난달에는 법성게에서 가르쳐 주는 내용하고 우리시대의 가장 큰 아픔인 세월호하고 연결 시켜서 이야기 해 보았습니다. 세월호가 우리에게 가장 큰 아픔인 이유가 무엇일까요? 죽어서는 안 될 사람들이 죽었다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그 죽음이 본인들이 나쁜 짓을 했거나 잘못을 해서 죽은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국가가, 정부가, 또는 온 국민이 해야 할 역할을 충분하게 하지 못함으로인해 우리가 보는 앞에서 너무나 어처구니없이 죽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것이 더 큰 아픔이고, 슬픔인거죠.

그 중에서 가장 아픈 사람이 누구일까요? 유족들이죠. 그 유족들이 겪어야할 아픔이 한두 가지가 아니겠지만 내가 사랑했던 가족이 이제는 영원히 사라져 버렸다, 두 번 다시 함께 할 수 없다는 것이 가장 큰 아픔이고 슬픔인 것입니다. 그런데 법성게에서는 뭐라고 이야기하고 있을까요? 죽음으로써 모든 것이 끝난다, 영원히 이별한다, 영원히 사라진다. 우리는 이렇게 알고 믿고 있지만 법성게에서는 그렇지 않다고 이야기합니다.

우리는 인생이라고 하는 것이 80년 전에 태어나면서 시작되고 80년이 지난 다음에 죽음으로써 영원히 끝나고 마는 참으로 허무하고 허망한 것이라고 믿고 있죠. 그런데 법성게에서는 그것은 사람들이 인생을, 세상을 잘못 알고 믿는 것일 뿐 실제로는 그렇지 않다고 이야기해요. 그렇다면 실제로는 어떠한가. 태어나면서 시작되고 죽으면서 끝나는 그런 인생, 그런 세상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태어나면서 시작되고 죽으면서 끝난다고 생각하는 것은 우리가 인생을, 세상을  잘 몰라서, 어리석어서 실제 내용을 잘못 파악해서 잘못 알고 잘못 믿는 것이지 실제로는 그렇지 않습니다.

 현상적으로 보면 죽음으로 인해 내 앞에 있던 사람이 어디로 사라져 버리기도 하고 내가 알던 그 사람의 모습, 얼굴을 다시는 볼 수 없게 되어 버리기도 합니다. 비록 그렇다고 하더라도, 실제로는 내가 알던 그 모습 그대로 만날 수는 없지만 그렇다고 하여 영원히 사라지고 끝나버리는 것이 아닙니다. 생명의 세계라고 하는 것은 시작과 끝이 없습니다. 다만 끊임 없이 변화된, 변화하는 또 다른 모습, 또 다른 내용으로 존재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생각하는 것처럼 죽음으로 인해서 영원히 끝나버리고 영원히 사라져 버리지 않습니다. 마치 바다와 파도 같습니다. 일반적으로 생각할 때 파도가 일어나는 것은 태어남에 비유하고 파도가 가라앉는 것은 죽음에 비유해서 이야기 합니다.  바다가 움직이면 파도인 것이고, 바다가 움직이지 않으면 바다인 것이죠. 파도가 일어나는 현상을 바다의 처음이라고 이야기하고 파도가 가라앉는 현상을 바다의 영원한 끝남이다라고 이야기할 수 있는가요? 절대 그럴 수 없죠. 우리가 잘못 보고 있기 때문에 시작과 끝이 있다고 생각하데 그것은 그야말로 생각 중 망상일 뿐입니다. 실제는 어ㄹ까요? 절대 그렇지 않습니다.  바다는 끝없이 움직이고 변화하고 있을 뿐입니다. 그 변화하는 모습이 파도가 일어났다가 사라지는 현상인거죠. 법성게는 우리의 生과 死도 바다의 파도가 일어났다가 가라앉는 것과 같다고 이야기합니다.

이 이야기를 세월호 사건과 연결시켜 봅시다. 일반적인 생각과는 다르게 이승을 떠나서 저승으로 간 아이들, 또는 그 분들도 비록 우리 눈앞에서는 사라졌지만, 내가 기억하는 모습 그대로는 만날 수는 없지만 이 우주, 이 지구 어디에선가 지금 이 순간에 바다의 파도처럼 또 다른 내용 또 다른 모습으로 함께 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바다의 파도가 끊임없이 다양한 모습으로 출렁거리듯이, 이런 모습으로 시작되었다가 이런 모습으로 가라앉고,  저런 모습으로 시작되었다가 저런 모습으로 가라앉듯이, 그야말로 천태만상의 모습으로 일어났다가 가라앉고 또 일어났다가 가라앉습니다. 생명의 세계도 그렇다는 것이죠. 그래서 지금 이 순간도 그 분들이 우주 또는 지구 어딘가에서 또 다른게 변화된 내용과 모습으로 우리와 함께 하고 있다고 법성게는 설명하고 있습니다. 이런 내용을 무한한 생명, 영원한 생명이라고 표현합니다.

 우리가 생각하는 영원히 끝나버리는 죽음이란 존재하지 않습니다. 오로지 끊임없는 변화하는 활동만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알든 모르든 세월호 희생자들은 우리와 늘 우리와 함께 하고 있다고 이야기 할 수 있습니다.

생과 사의 문제, 만남과 헤어짐의 문제, 또는 나타남과 사라짐의 문제를 이렇게 파악하고 이렇게 이해하면 그런 문제가 생긴다고 하더라도 우리가 덜 두려워하고, 덜 슬퍼하고, 덜 힘들어하면서 삶의 문제를 좀 더 지혜롭게, 바람직하게 가꿔갈 수 있다고 봅니다. 그래서 부처님 가르침이 중요하다고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3. 그런데 왜 세월호 이야기를 계속 해야 하는가

제가 왜 그랬는지는 잘 모르겠는데 처음 세월호 소식을 접했을 때 앞으로 우리는  세월호에 대해 십 년은 관심을 갖고 이야기해야 한다고 했었습니다. 그리고 기회가 있을 때 마다 세월호 희망찾기에 대해 이야기했습니다. 그런데 언제부터인가 사람들이 싫어해요. 불편해하고 불만스러워하고 짜증스러워하더라고요. 최근에는 실상사에서도 그런 반응이 있었습니다. 어떤 보살님은 항의를 하기도 하고 불만을 토로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반대로 어떤 곳에서는 불교계가  왜 세월호 이야기를 적극적으로 하지 않느냐고 불만을 표시하기도 합니다. 한 쪽은 세월호 이야기를 한다고 불만을 토로하고, 또 한쪽은 이야기를 하지 않는다고 불만을 토로하고 이럴 때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하지 말자는 쪽 이야기를 들어야 할까요, 하자는 쪽 이야기를 들어야 할까요? 어떻게 해야 할까요?

누구 말을 들어야할까요? 당연히 부처님 말씀대로 해야겠죠? 그래야 맞겠죠? 우리가 하지 않는 것이 옳고 바람직하고 그것이 부처님 가르침에 맞다면 당연히 하지 않아야겠지요. 반대로 하는 것이 옳고 바람직하고 부처님 뜻에 맞다면 당연히 해야 되겠지요? 중요한 것은 하지 말라는 쪽을 편들 것인가, 하라는 쪽을 편 들것인가가 아닙니다. 내용이 무엇인지가 중요합니다. 어떤 내용이 옳은 것인가, 어떤 내용이 바람직한 것인가 어떤 내용이 부처님의  뜻에 맞는 것인가. 이것이냐, 저것이냐가 아니라 부처님의 뜻에 맞는 것, 더 옳은 것, 더 좋은 것인지가 판단기준이 되어야 합니다. 그렇게 보면 세월호 이야기는 계속 할 수밖에 없습니다. 해야 마땅합니다.

부처님 가르침은 다른 데 있는 것이 아닙니다. 핵심은 우리가 더 자비로워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더 너그러워져야 하고 더 겸손해져야 하고 더 진실해져야 하고 더 평화로워져야 하고 더 따뜻해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야만 사는 것이 편안하기 때문입니다. 인생이 아름다워지기 때문입니다. 인생이 행복해 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야만 나도 좋고 너도 좋고 우리 모두가 좋아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팔만사천 법문이 라고 이야기하지만 그 내용을 다 살펴보면 표현만 다를 뿐이지 뜻하는 바는 모두 한결 같이 자비롭게 살아야한다는 내용입니다.  

 세월호 이야기를 하는 것은 세월호 때문에 돌아가신 분들을 위해서 하는 것도 아니고 그 유족들 때문에 하는 것도 아닙니다. 그러면 누구 때문에 하는가? 저 자신 또는 우리 모두를 위해서 그렇게 하는 것입니다. 왜냐구요? 그렇게 하는 것이 부처님 뜻에 맞고 우리모두 더 인간다워지로 우주 세상이 더 좋은 세상이 되기 때문입니다.

그 말은 달리 이야기 하면 우리 모두 인간적으로, 인격적으로 수준을 더 높여야 된다는 이야기이기도 합니다. 왜? 수준을 높이지 않으면 나, 그리고 우리 모두가 풍년이 들어도 행복하지도 희망차지도 않으며 청년들에게도 희망을 줄 수 없게 됩니다. 우리 스스로가 그런 변화와 성장을 이뤄내지 않는다면 풍년이 들어도, 부자가 되어도 허망하고 불행해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 삶이 정말 보람차고 행복해지려면 우리가 더 자비로워져야 합니다. 우리 스스로의 수준을 높여야 합니다.

우리가 먹고 사는 것은 수준이 굉장히 높아졌습니다. 이전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이 높아졌죠. 우리가 입는 것도 그렇고, 먹는 것도 그렇고, 집도 그렇고, 기타 삶에 필요한 조건들은 수준이 대단히 높아졌습니다. 그런데 불행하게도 우리 마음의 수준은 높아지지 않았습니다. 우리 정신의 수준, 인격의 수준은 높아지지 않았습니다. 우리 마음의 수준을 높이는 길, 인격의 수준을 높이는 길을 중요하게 다루지 않고서는 풍년이 들어도 우울할 수밖에 없고 대풍이 들어도 암담할 수밖에 없습니다. 지금 현실이 그렇게 나타나고 있지 않습니까?

사람이라고 하는 것은 누구든지 자기중심적으로 생각하게 되어있습니다. 자기중심적이고 이기적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 습성을 가지고 살아갑니다. 왜 그럴까? 그것은 인생을 잘 모르기 때문입니다. 잘 모르기 때문에 인간이 이기적인 것을 당연하다고 이야기 하는 겁니다. 사실 인간이 이기적으로 되는 것은 인생을, 세상을  잘못알고 믿고 살기 때문에 그렇게 된 것입니다.

불교가 세상에  사람들에게 희망의 가르침으로 평가받는 것은 사람들로 하여금  잘못 알고 있던 것을 바로 알게 해주기 때문입니다. 인생을 제대로 알게 되면 풍년이 들면 풍년이 드는 대로, 안 들면 안 드는 대로 삶이 보람차고 기쁘고 행복할 수 있습니다. 잘 모르고 살면 풍년이 들어도 기쁘지 않고 대풍이 들어도 삶이 암담한 거예요. 우리가  잘못 알고 살기 때문에 인간은 당연히 이기적이다라고 생각을 해요. 그런데 실제 경험해 보면 자기중심적이고 이기적인 생각을 갖고 삶을 살아가는 한 그 삶이 절대 편안해질 수 없습니다. 절대로 인간다워질 수 없습니다. 여유로워질 수 없습니다. 아름다워질 수 없습니다. 당연히 행복해 질 수 없죠. 자기중심적이고 이기적인 욕구를 채우는 방식으로는 천지를 개벽해도 우리는 결코 인간다워질 수 없고 편안해질 수 없고 여유로워질 수 없고 아름다워질 수 없고 평화로워질 수 없고 행복해질 수 없습니다.

 왜 그럴까요? 생명의 진리가, 인간의 진리가, 세상의 진리가 그렇게 되어있기 때문입니다. 성인들이 자비, 어짊, 사랑을 그토록 강조하는 까닭이 바로 거기에 있는 것입니다.

인생은 연못과 연꽃의 관계 같은 거예요. 만약에 연꽃은 연꽃대로 자기중심적이고 이기적인 입장을 견지하고 연못은 연못대로 자기중심적이고 이기적인 입장을 견지하면 어찌되겠습니까? 연못에서 연꽃이 아름답게 피어날 수 있겠습니까? 절대 피어날 수 없습니다. 또 연꽃이 살 수 없는 연못을 살아있는 연못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절대 살아 있는 연못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연꽃은 연못에 의지해서만 아름답게 피어날 수 있고 연못은 연꽃에 의지해서만 살아있는 연못이 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실제로는 연못이 연꽃을 살리고 있고, 연꽃이 연못을 살리고 있는 거예요. 서로서로가 의지하고 서로서로가 도움으로써 연꽃은 연꽃다워지고 연못은 연못다워지는 거죠. 그렇게 할 때 연꽃도 좋고, 연못도 좋아집니다. 이것을 인간에게 적용시키면 나는 너에게 의지해서 있고, 너는 나에게 의지해서 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4 따라서 서로서로가 도우면서 살 때 너도 좋고, 나도 좋아 진다는 거죠.

세월호 사건을 연꽃과 연못이야기에 비유해본다면 세월호는 연꽃에 해당되고 우리는 연못에 해당되는 거죠. 연못이 연못다워지려면 어떻게 해야 되겠습니까? 연꽃이 건강하게 잘 자라고 아름답게 잘 피어나도록 해줘야만 연못이 연못다워지죠. 그런데 만약에 그렇게 하지 않고 연꽃이 메말라 죽든지 말든지, 병들어 죽든지 말든지 연못인 나는 나 편한대로 ‘내 기분대로 갈 거야’라고 한다고 생각해 봅시다. 그렇게 되면 연꽃이 다 말라죽고 연못에는 아무런 생명도 살 수 없습니다. 아무 생명도 살 수 없는 연못, 그것은 살아있는 연못일까요? 죽은 연못일까요? 그것은 죽은 연못이죠.

세월호 이야기를 하면 사람들은 박근혜 대통령을 공격하는 것으로, 또는 현 정부를 비판하기 위한 것으로, 아니면 마치 진보가 보수를, 좌파가 우파를 공격하는 것으로 생각합니다. 사실 그런 목적으로 이야기 하는 사람도 전혀 없지 않죠.  그런 방식으로 문제를 다루는 사람도 있죠. 하지만 인간적으로 불교적으로 볼 때 그것은 옳지 않습니다. 그런 방식으로 세월호 문제를 다룬다면 세월호 이야기를 하자는 사람들도 옳지 않고 하지 말자는 사람도 옳지 않습니다. 누구를 공격하기 위해서, 누구와 싸워이기기 위해서 또 내 편을 이기게 하도록 만들기 위해서 세월호를 이야기 하고 있다면 세월호를 이야기 하자는 쪽도, 하지 말자는 쪽도 모두 옳지 않습니다. 적어도 부처님 가르침에 입각해서 또는 법성게의 정신에 입각해서 우리는 세월호 문제를 다뤄야 합니다.  그렇게 세월호 문제를 다루는 것은 바로 내가, 우리가 마음으로 정신으로 인격으로 더 변화되고 더 향상되고 발전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렇지만  세월호를 관심있게 다루는 것이 우리가 더 자비로워지고 수준이 높아지는 것과 어떤 관련이있는지 의아해합니다. 예를 들어 생각해 봅시다. 우리가 길을 가는데 한 아이가 물에 빠질 위기에 처한 모습을 보았다고 가정해 봅시다. 그 길을 가던 사람들은 나름대로 다 사정이 있고 나름대로 다 바쁘고 나름대로 다 어렵고 힘이 듭니다. 다 나름의 사정을 가지고 있는 것이죠. 그렇게 모두가 이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 중의 한 사람이 바로 뛰어들어서 그 아이를 건져냅니다. 반면 다른 사람들은 바쁜 일, 급한 일, 중요한 일 등 다 이유가 있으니까 아이의 상황이 안타깝긴 하지만 ‘내 사정상 어쩔 수 없어’하고 그냥 갔습니다.

만사 제치고 뛰어 가서 아이를 건진 경우와 마음에는 걸리지만 내 일이 바쁘다고  모른 척하고 자신의 일을 보러 간 경우가 있습니다. 그냥 갔다고 해서 그 사람이 꼭 나쁜 사람이라고 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누가 더 자비로운가요? 당연히 뛰어들어서 건진 사람이 자비롭죠. 누구의 마음이 더 아름답습니까? 당연히 아이를 건져준 사람의 마음이 아름답지요.

그리고 실제 그렇게 하고 났을 때 누가 더 편안할까요? 누가 더 기쁠까요? 누가 더 흐뭇할까요? 누가 더 인간적으로, 인격적으로 더 훌륭하다고 할 수 있을까요? 어찌보면 물어보나마나 하지요.

당연히 자기 일을 보러 간 사람들은 더 많은 무언가를 이뤄냈을 겁니다.  돈을 많이 벌었다든가 더 많은 이익을 챙겼을 거예요. 반면에 아이를 구한 사람은 이런저런 차질이 생겨 벌어야 할 돈도 벌지 못하고 일도 많이 어렵게 되었을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한 번 생각해 봅시다. 그래서 비록 돈을 더 벌었다고 칩시다. 그렇다 하더라도 사람인 이상 일생일대를 두고 마음에 걸리지 않을까요? 늘 뭔가 미안한 마음이 들고 부끄러운 느낌도 있고 양심의 가책도 느끼게 될 겁니다.  너무나 당연히 그렇지 않겠습니까? 따라서 그 삶이 괴롭고 힘들게 되죠, 그야말로 불행한 삶이죠. 인생의 실상이 그렇습니다.

우리시대에 세월호사건은 대단한 상징적 의미를 갖습니다. 우리 시대 누군가의 아픔이고 누군가의 슬픔입니다. 내 아픔이나 내 슬픔이 아니라 누군가의 슬픔, 누군가의 아픔인거죠. 내 아픔이나 내 슬픔에 골몰하는 것은 누구나 다 하는 거예요. 그런데 내 아픔과 내 슬픔이 아니라 누군가의 아픔과 누군가의 슬픔을 정말 내 일처럼 같이 아파하고 같이 슬퍼합니다. 또 그 슬픔을 위로하기 위해서 그 슬픔을 해결하기 위해서 조금이나마 마음을 내고 뜻을 내고 구체적으로 노력을 합니다.

누군가의 슬픔과 아픔을 함께 하는 마음, 그 슬픔을 위로하고 그 아픔을 해결하기 위해서 노력하는 마음과 태도 이것이 자비심입니다. 그런 과정을 통해서 자비심은 성장해 갑니다. 그런 과정을 통해서 우리는 더 자비로운 인간으로 새롭게 태어나기도 하고 발전해 가는 거죠. 우리가 아무리 기도를 많이 하고 참선을 많이 하고 불경 공부를 많이 하고 절에도 자주 가는 등 온갖 좋은 일을 다 해도 자비심이 자라고 있지 않다면 자비로운 인간으로 변화하고 발전하고 있지 않다면 의심을 해 보아야 합니다. 과연 우리가 불교 공부를 제대로 하고 있는 것인가, 기도를 제대로 하고 있는 것인가, 참선을 제대로 하고 있는 것인가, 염불을 제대로 하고 있는 것인가, 불교인으로써 제대로 살고 있는 것인가 하는 점을 의심해 보아야 합니다. 우리가 기도한다, 참선한다, 염불한다, 경전공부를 한다, 또는 봉사활동을 한다, 시주를 한다, 불사를 한다고 하는 것은 모두 자비로워지기 위한 것입니다. 더 너그러워지기 위한 것입니다. 더 겸손해지기 위해서, 더 따뜻해지기 위해서, 더 인간다워지기 위해서, 더 자비로워지기 위해서 입니다.

왜 그렇게 되어야 할까요? 그럴 때에만 우리 삶이 기쁘고 희망차고 행복하기 때문입니다. 다른 길은 없습니다. 있을 것 같죠? 있을 것 같지만 있을 것 같을 뿐 실제로는 없습니다. 있을 거라는 생각이 바로 착각이었음을 오늘 우리는 확인했습니다. 역대 최대의 풍년이 들었는데도 기쁘지 않다는 것이 바로 그 증거입니다. 최대의 풍년이 들었는데도 희망차지 않다, 행복하지 않다는 것으로 증명되고 있습니다. 이렇게 눈앞에서 증명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구태의연히  잘못 알고  잘못 믿고 있는 것을 옳고 좋은것이라고 쫓으면 그것은 어리석은 일이잖아요. 또 어떻게 보면 우리는 불교를 공부한다고 하면서도 불교를 공부하고 있지 않다는 것을 증명하는 꼴이죠.

오늘은 제가 법성게를 하는 시간입니다만, 지난 달 법회 이후 세월호 이야기를 그만하자는 항의가 들어왔다고 하기에 이 이야기를 공식적으로 하게 되었습니다.

대부분 세월호 이야기를 안 한다고 뭐라고 하는 사람들하고 한다고 뭐라고 하는 사람과  편이 쫙 갈려 있습니다 다 그런 것은 아니지만 세월호를 이야기하는 사람들은 대통령이나 정부를 공격하려는 마음이 없지 않아 있습니다. 또 세월호를 이야기하면 안 된다고 하는 사람들은 대통령이나 정부가 잘 하고 있는데 왜 자꾸 이 너희들이나라를 어지럽게 하냐고 못마땅해 합니다. 그리고 자신들은 국가를 위해서 그렇게 하는 것이라고 합니다.

하지만 사실은 양쪽 모두 바람직하지 않습니다.  세월호 사건을 기억하고 이야기하는  것을 그런 차원으로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일상적으로 세월호를 화두로 삼는 이것은 우리가 사람 되기 위한 길이기 때문입니다. 인간다워질 수 있는 최고의 길이기 때문에, 가장 효과적인 길이고 가장 직접적인 길이고 가장 현실적인 길이기 때문에 그렇게 노력해야하는 것입니다.  이 길이 가장 현실적이고 효과적이고 직접적인 길인 이유는 인간은 행위 하는 대로 이루어지는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거짓말하면 거짓말 하는 인생이 되고 욕설을 퍼부으면 욕을 퍼붓는 사람이 되고 도둑질하면 도둑놈 인생이 됩니다. 그런데 우리가 누군가의 아픔을, 누군가의 슬픔을 함께 슬퍼하고 아파하고 그 아픔을 위로하고 그 아픔을 해결하기 위해서 노력하면 이것이 바로 자비로움이잖아요. 그렇게 마음 쓰고, 그렇게 생각하고, 그렇게 행위 하면 곧 내가 자비로운 인간으로 태어나고 있는 것입니다. 자비로운 인간으로 성장하고 발전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자비로워진 만큼 우리는 보람을 느낄 수 있고 기쁠 수도 있고 희망찰 수도 있고 행복할 수 있습니다. 오늘은 이 이야기를 공식적으로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꺼내보았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못마땅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러나 그것을 불편하게 느끼는 것 또는 못마땅하게 생각하는 것이 결코 옳거나 바람직한 생각이 아니라는 것을 잊지 않으셨으면 좋겠습니다.

 ‘그 사회 정말 괜찮은 사회야’라고 이야기 되는 소위 선진국, 선진사회에서는 이런 문제가 생겼을 때 어떻게 할까요? 그 곳에서는 이쪽이 하는 말, 저쪽이 하는 말을 판단 기준으로 삼지 않습니다. 대통령, 정부쪽이 뭐라고 하는가, 아니면 비판하고 문제제기 하는 사람들이 뭐라고 하는지가 판단 기준이 아니에요. 그렇다면 무엇이 판단기준이겠어요? 판단기준은 피해자 당사자예요. 피해자 당사자가 괜찮다고 하는가, 그렇지 않은가가 판단기준이 되어야 합니다. 피해자가 “이제 됐어, 괜찮아.” 이렇게 말할 수 있는지가 판단기준입니다. 이렇게 문제를 다루는 사회를 선진사회라고 이야기 합니다. 이렇게 문제를 다루는 사람을 괜찮은 사람이라고 이야기 합니다.

그래서 세월호 문제를 우리가 지속적으로 다룰 것인가 그렇게 하지 않을 것인가에 대한 해답을 찾으려면 대통령에게 가서 물어서도 안 되고, 야당에게 물어서도, 경상도나 전라도에 물어서도 안 됩니다. 유족들에게 물어보아야 합니다. 유족들이 “이제 한이 풀렸다”, “여한이 없다”, “이제 괜찮다”, “이만하면 됐다”고 한다면 지금 바로 끝내도 됩니다. 잘 생각해보십시오. 그런데 우리 역사는 곳곳헤 한이 수북수북 쌓이고 있습니다. 이 한을 풀지 않고서는 미래를 만들어 갈 수 없습니다. 세월호 문제는 우리 역사 속에서 형성되었던 한을 녹이고 풀고 치유할 수 있는 대단히 중요하고 의미있는 기회이고 사건입니다. 우리 역사 속에 쌓인 한을 녹이고 풀고 치유해서 새로운 희망의 새 살이 돋도록 하는 출발점이 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세월호 문제가 중요하다고 하는 것입니다. 또 우리가 줄기차게, 다양한 방식으로 이야기를 해야 한다고 하는 것입니다. 누구를 위해서? 첫 째는 저 자신을 위해서, 두 번째는 각자 우리 모두를 위해서. 그래야 우리 아이들의 미래가 나아질 수 있고 희망적일 수 있습니다.

그동안은 저를 좋아했던 사람들 중에 제가 종단에 가서 일을 한다고 해서 실망하고 불만스러워하고 못마땅해 하면서 비난하는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그 사람들은 주로 세월호 이야기를 해야 된다고 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런 사람들을 우리는 대개 진보, 또는 좌파라고 이야기하죠. 그런데 최근 조계종단에서 첨예한 종단문제를 가지고 백인 대중공사를 했습니다. 백인 대중공사를 통해서 아주 첨예한 문제를 편이 갈리고  싸워서 승부를 내는 방식이 아니라 지금 우리처럼 원형으로 둘러앉아서 더 나은 길이 , 더 좋은 길이 , 더 바람직한 길이 어떤 것인가를  머리를 맞대고 이야기해서 합의를 이끌어 냈습니다. 옛날 같았으면 각목 들고 싸움이 벌어졌을 아주 위험한 일이었어요. 대중공사판에서 그렇게 이야기를 정리하고 나니까 그 동안 그 일을 한다고 나한테 굉장히 불만을 토로하던 사람들의 태도가 달라졌습니다. 불만을 가졌던 사람이 다섯 사람이라면 그 중 세 사람은 “도법스님이 하는 일이 정말 괜찮은 일이네”하면서 제 방식에 대해 공감을 해주었습니다. 나머지 두 사람은  반신반의 하면서 “괜찮은 것 같기는 한데 뭔가 좀 이상해”라고 하며 여전히 못마땅해했습니다. 그렇지만 내용적으로보면 짧은 기간에도 불구하고 엄청나게 변화하고 있었습니다. 변화하는 모습을 보면서 그동안 숱하게 비난받고 욕을 들으면서도 애썼던 것이 헛되지 않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런 비난과 욕을 들으면서도 좀 더 나은 길을 찾아보고자 노력했던 것이 나름대로 무언가 성과가 있고 보람 있다는 경험을 하고 있습니다. 아마 오늘 이야기도 똑같은 내용으로 귀결되지 않을까 싶습니다.

인간다워진다는 것은 무엇이겠습니까? 그것은 더 자비로워진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더 자비로워지기 위해서 불편하고 힘들지만 좀 더 크게 마음을 냈으면 좋겠습니다. 그런 마음으로 올 추석도 정말 의미 있게 잘 보냈으면 좋겠습니다.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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