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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현법회 | [법성게강의] “지금 여기 이 순간 자기 자신”이 본래 자리(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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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실상사 작성일16-05-13 00:36 조회3,049회 댓글1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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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 11. 22. 일요일. 실상사 보현법회


회주 도법스님 법문

 


“지금 여기 이 순간 자기 자신”이 본래 자리 (1)



 

1.

 

우리는 살면서 끊임없이 더 편안한 것, 더 좋은 것, 더 쉬운 것, 더 따뜻한 것, 더 풍요로운 것을 추구합니다. 그리고 그것들이 충족되면 행복할 것이라고 믿습니다. 그런데 실제는 어떤가요? 잘 관찰해보면 그것들은 이루어질 것 같을 뿐, 실제 이루어지지도 않고 이루어져봐야 잠시일 뿐 실제 행복하지도 않습니다. 어떻게 보면 실제 이루어질 경우 대단히 문제가 됩니다. 부분적으로 보면 괜찮아 보일 수도 있지만 실제 우리가 생각하는 대로 더 편하게, 더 쉽게, 더 재미있게 등 우리가 좋다고 생각하는 것들이 다 이루어질 경우 대단히 심각한 문제가 됩니다. 왜 그럴까요? 인생의 실상이 그렇게 되도록 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좀더 설명을 하면 인간이 노력해서 할 수 있는 것도 있고 할 수 없는 것도 있다는 이야기입니다. 세상의 실상이, 인생의 실상이 그렇기 때문에 부처님은 한 마디로 ‘세상은 고(苦)다’ 또는 ‘세상은 불타는 집과 같다’고 하셨습니다.

 

세상에는 사람이 가야 되는 길, 가서는 안 되는 길이 있습니다. 달리 표현하면 사람이 해도 되는 길, 해서는 안 되는 길, 즉 세상이치가 있다는 거죠. 이것을 ‘진리’ 또는 ‘도’라는 단어로 표현하기도 하고, ‘법’이라는 말로 표현하기도 합니다. 그 길에 맞게 걸어가야만 우리가 풀고 싶은 문제가 풀리기도 하고 우리가 실현하고 싶은 삶을 실현할 수가 있습니다. 그 길을 통하지 않고는 우리가 원하는 행복한 삶을 살 수 없습니다.

 

그러나 인간은 대부분 본래 있는 법의 길과 관계 없이 자기 생각대로 꿈을 꿉니다. 백팔번뇌, 팔만사천번뇌라는 말로 표현하기도 합니다. 그것을 더 줄이면 탐‧진‧치라는 말로 요약됩니다. 탐진치, 오욕락으로 표현도는 망상의 바람은 이루어질 수도 없고, 이루어져봐야 행복해지지도 않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루어진다는 믿음, 행복해진다는 믿음으로 쫓아다니게 되는 것은 우리의 무지요 부질없는 욕심입니다. 꼭 무엇을 훔쳐야만, 빼앗아야만 나쁜 짓이고 다른 사람을 속이려고 궁리하는 것만 망상이 아닙니다. 실제에 어긋나는 것, 이치에 어긋나는 것을 실재라고 착각하고, 또 이루어진다고 믿고 매달리는 것이 다 무지한 욕심이고 망상인 것이죠.

 

우리가 알고 믿는 것들을 사실 확인해보면 엉터리인 것들이 대부분입니다. 한국사회에서 가장 강력한 엉터리가 뭘까요? 지금 온 나라를 지배하고 심지어는 종교마저도 지배하고 있는 것이 무엇일까요? (돈이요). 그렇죠. 돈입니다.

얼마 전에 수능시험이 있었죠. 시험판에서 강조되는 목표가 뭐죠? 일등입니다. 일등만이 희망이라고 말하죠. 모든 사람들이 일등에 목을 매고 있습니다. 왜 그렇게 될까요? 일등만이 희망이라는 말을 진짜라고 믿기 때문이죠. 우리의 지식과 믿음처럼 정말 그럴까요? 사실확인을 한 번 해봅시다. 틀림없을 것이라고 알고 믿고 있지만 확인해보면 그것은 새빨간 거짓말입니다. 일등은 몇 사람입니까? 한 사람입니다. 두 사람일 수가 없습니다. 일등이 안정적일 수 있나요? 언제나 뒤집히게 됩니다. 결국 실현될 수 없다는 결론에 도달합니다. 모두 절망할 수밖에 없는 모두 불행할 수 밖에 없는 이야기입니다. 그런데도 온통 ‘일등만이 희망’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일등을 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하죠? 죽기살기로 경쟁해야 합니다. 왜? 일등은 한 명밖에 없으니까요. 지금의 현실에서는 극단적으로 경쟁할 수밖에 없습니다. 극단적인 경쟁을 해야 하는데 어떻게 인간다울 수 있겠습니까? 진정한 이웃이 될 수 있겠습니까? 괜찮은 친구가 될 수 있겠습니까? 그 판에 편안함이, 따뜻함이, 여유로움이 있을 수 있겠습니까? 다 불가능합니다. 실제가 그런데도 신문에서, 방송에서, 학교에서는 마치 행복해질 것거처럼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기가 막힌 상황이예요. 이런 현상을 반야심경에서는 뭐라고 합니까? 전도몽상이라고 합니다.

 

우리 사회에서 돈과 관련되어 만연해 있는 생각이 무엇입니까? ‘부자 되면 행복해’입니다. 그렇게 다들 믿고 있어요. 우리 조상 대대로 내려왔던 새해 덕담이 무엇이었지요? “복 많이 받으십시오.‘입니다. 그런데 지금은 뭐라고들 하지요? ”부자되세요“라고 합니다. 이 현상이 얼마나 무시무시한 이야기인지 모릅니다. 우리가 존경하고 고마워하는 할머니, 할아버지에게, 엄마, 아빠에게 하는 덕담일 수도 있고, 반대로 손자손녀에게 하는 어른들의 덕담일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정말 부자되면 행복해질까요? 어떻습니다. 사람들이 머릿속에 그리고 있는 부자는 이루어질 수 없습니다. 그리고 이루어지면 큰일 납니다. 이루어질 수 없는 건데 마치 이루어질 수 있는 것처럼 모두에게 ‘부자 되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새빨간 거짓말입니다.

그런데도 “일등만이 희망이야”, “부자되면 행복해”라는 것에 온 나라가 여기에 사로잡혀 있습니다. 그런데 실제 확인해보면 어떨까요? 첫째, 새빨간 거짓말입니다. 왜? 이루어질 수 없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둘째, 대단히 위험한 거짓말입니다. 왜? 이루어지면 큰 일 나기 때문입니다. 왜 큰 일 나는지 아세요?

 

지금 지구촌에는 70억 인구가 살고 있습니다. 70억 인구가 평소에 우리처럼 먹고 쓰고 살면 현재 인류 문명은 유지될 수가 없습니다. 이 마이크도 당장 꺼질 수밖에 없습니다. 여러분들 가정에 있는 냉장고도 사용할 수 없습니다. 삶이 불가능해요. 자원 상으로, 에너지 상으로, 자연 생태 조건 상으로 불가능하게 되어 있습니다.

 

지금 우리가 현재의 삶을 누릴 수 있는 것은 어디선가, 곳곳에서 무수한 사람들이 굶주림에 시달리고, 헐벗음에 시달리고, 빈곤에 시달리는 삶을 감내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들 덕에 지금 여기에서 우리의 현재 삶이 가능한 것입니다.

 

70억 인구가 동시에 우리처럼 산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모든 문명은 마비 될 수밖에 없습니다. 저 고속도로에 달리고 있는 차들, 다 제자리에 설 수밖에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들의 욕심대로 이루어지면 모두 다 함께 망하게 됩니다.

 

기존의 논리로 보면 누군가는 부자되고, 누군가는 가난해진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렇게 될 경우 어떨 것 같습니까? 나는 부자가 되어서 늘 맛있게 잘 먹고 배 두드리면서 희희낙락하고 있고, 내 옆에 있는 누군가는 굶주려서 죽네사네 하고 있다면 어떨까요? 괜찮을까요? 옆에서 죽네사네 하든지 말든지 나만 잘 먹고 잘 산다면 그것이 사람인가요? 그건 사람이 아니죠?

부자나 일등, 모두 생각이나 말로는 괜찮을 것 같지만 실제로 확인을 해보면 절대 그렇게 되면 안 되는 것들입니다. 우리는 생각이나 말로 괜찮은 것처럼 보이면 다 괜찮다고 생각하는데, 그 생각과 믿음이 바로 망상입니다. 생각이나 말을 쫓아가면 된다고 생각하는 것이 바로 전도몽상인 것입니다. 실제로는 절대 그렇지 않습니다.


2.

 

세상에는 이치가 있습니다. 세상의 이치가 뭡니까? “태어난 자는 반드시 죽는다.”, “죽은 자는 반드시 태어난다”, 마치 바다의 파도처럼. 이것이 세상이치입니다. 인류가 시작된 이래 죽지 않은 사람이 한 사람도 없습니다. 죽음이 없는 영원한 삶이 있는 것처럼 이야기하지만 그것은 이야기일 뿐입니다. 실제로는 없습니다. 부처님이 깨달은 것이 바로 세상이치입니다. 실제 반드시 죽는다는 사실을 제대로 알아야만 인생을 제대로 살 수 있습니다. 죽음을 모르고는 삶을 제대로 살 수가 없습니다. 현대인은 죽음을 너무 모릅니다. 죽음을 모르고 삶을 모른다는 이야기는 삶을 제대로 살 수 없다는 이야기입니다.

 

‘태어난 자는 반드시 죽는다. 만나면 반드시 헤어진다. 평소 우리 불교인들이 강조하는 내용입니다. 그런데 잘 살펴보면 막연히 강조만 할 뿐 이것이 실제 삶에 어떤 의미를 갖는지에 대해서는 깊이 천착하지 않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결국은 태어난 자는 반드시 죽는다는 진리, 세상의 이체에 대해 지식으로만 생각과 말로만 알고 있을 뿐 그 진리를 실제 삶에 적용했을 때, 삶에 어떤 변화가 일어나는지 무엇이 달라지는지 내가 가지고 있는 인생의 짐이 얼마나 가벼워지는지에 대해 거의 잘 모르고 있는 것이지요. 무슨 말인고 하니 우리가 불교를 생각으로 말로 지식으로 즉 관념적으로 하고 있다는 이야기입니다. 구체적으로, 사실적으로, 실제적으로, 즉 중도적으로 하고 있지 않다는 의미이지요. 만일 이 진리를 생각으로가 아니고 실제적으로 관념적으로가 아니고 중도적으로 제대로 적용을 하면 어떨까요? 바로 인생의 짐이 훨씬 가벼워집니다. 사는 것이 편안하고 홀가분해집니다.

 

불교에서 강조하고 있는 ‘무상’의 진리가 그냥 현실 삶과 별 관계없는 지식으로만 갖고 있으라는 것이 아님을 명심해야 합니다. ‘상대 없이 내 인생은 존재할 수 없다’는 진리를 불교적으로는 ‘연기무아(緣起無我)’라고 표현합니다.

 

너 없는 내가 존재하지 않는 것이 사실이고, 이 사실을 여러분들의 사고방식과 삶의 방식에 적용하면 삶이 어떻게 달라질 것 같습니까? 지금은 ‘너는 너고, 나는 나야’, ‘너 없어도 나 괜찮아’, 더 나아가서 어쩌면 ‘너 없는 것이 나에겐 더 좋아’라고 생각하기도 하죠?

 

왜 그럴까요? 둘이 있으면 독점할 수 없잖아요. 나 혼자면 나 혼자 다 먹어도 되는데. 그러니 “너는 너고 나는 나야”, “너 없어도 괜찮아”, “너 없는 것이 나에겐 더 이익이야”, 우리는 인생을 이렇게 믿고 알고 살고 있는 거죠. 그럼 어떻게 되겠습니까? 당연히 또는 자연스럽게 자기중심적이고 이기적으로 삶을 살게 됩니다.

간단히 생각해봅시다. 자기중심적이고 이기적인 사람들이 모여서 살면 어떤 일이 발생하겠습니까? 갈등과 대립이 일어납니다. 갈등과 대립이 계속 일어나는데 편안할 수 있겠습니까? 여유로울 수 있겠습니까? 따뜻할 수 있겠습니까? 아름다울 수 있겠습니까? 불가능합니다.

 

너와 나 사이에, 아내와 남편 사이에, 부모와 자식 사이에, 이웃과 이웃 사이에, 동료와 동료 사이에 모두가 자기중심적이고 이기적인 관점과 사고방식을 가지고 산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그곳은 싸움판일 수밖에 없습니다. 아수라장이 될 것입니다. 그곳에 무슨 평화가 있고 고상함이 있겠습니까.

 

생각과 말로는 인간다움, 평화로움, 따뜻함이 가능하겠지만 실제는 불가능합니다. 자기중심적이고 이기적으로 살면서 우리 평화롭게 살자, 더불어 함께 살자, 고상하게 살자고 할 경우 말로는 되지만 현실적으로는 가능하지 않습니다. 왜 그럴까요? 세상진리, 세상이치가 그러하기 때문입니다.

 

거듭 강조합니다. 너 없이 나는 존재할 수 없습니다. 너에 의지해서만 내가 존재할 수 있습니다. 실제 진리가 그렇습니다. 잘 살고 싶다면 자기중심적이고 이기적인 사고와 삶의 방식을 내려놓아야 합니다. 왜 그래야 할까요? 진리가 그러하기 때문입니다.

 

너는 나에게 너무나 귀하고 고마운 존재입니다. 당연히 상대를 존중해야 하고 고마워해야 합니다. 상대방을 존중하고 고마워하면서 사는 것을 뭐라고 이야기합니까? 더불어 함께 산다고 이야기합니다. 달리 표현하면 자비롭게 산다고 말합니다. 존중과 감사라는 말을 염두에 두시면 됩니다. 존중과 감사의 삶을 산다면, 그런 사고방식으로 삶을 살아간다면 너와 나의 관계가, 아내와 남편의 관계가, 부모와 자식의 관계가, 이웃과 이웃의 관계가, 동교와 동료의 관계가 어떻게 되겠습니까? 그래도 싸움판으로 갈까요? 절대 그렇지 않지요.

 

우주의 진리, 세상의 이체에 맞는 관점과 입장만 잘 정리하면 삶이 180도로 달라집니다. 이에 더하여 삶이 편안해집니다. 여유로워집니다. 따뜻해집니다. 인간다워집니다. 평화로워집니다. 굳이 참선을 안 해도, 기도를 안 해도, 삶의 무게가 확 줄어듭니다.

 

인생을, 세상을 바라보는 관점을 잘 정리해서 진리에 맞게 이치에 맞게 제대로 알고 제대로 실천하는 것이 진짜 참선이고, 기도이고, 수행인 거죠. 어쩌면 절하는 것도, 기도하는 것도, 참선하는 것도 진리를 제대로 알고 그에 맞게 실천함으로써 인생의 무거운 짐을 벗어내기 위한 것일 뿐 다른 목적이 있지 않습니다. 그렇게 해서 인생을 자유롭게, 품위있게 살고 싶은 거죠.

 

만일 우리가 이 점을 기본으로 삼지 않으면 우리가 하는 불교가 마치 앙꼬 없는 찐빵 같은 불교가 되고 맙니다. 기본이 바로 잡히지 않은 공부와 수행은 맨날 해도 아리송할 뿐이지요. 이것 같기도 하고 저것 같기도 하고, 알 것 같기도 하고 모를 것 같기도 하고, 되는 것 같기도 하고 안 되는 것 같기도 하고… 늘 그렇습니다. 십년을 해도, 이십년을 해도 그렇습니다. 아마 여기 계신 분들 중에 불교와 인연이 오래된 분들도 계실 텐데 여전히 그러고 있지 않을까 싶어요. 저도 그런 세월을 살아왔습니다. 참 답답하고 안타깝습니다. 어쩌면 한국불교의 현주소가 그렇지 않을까 싶습니다.

 

3.

 

오늘 처음 오신 분들이 많이 계셔서 <법성게> 공부 앞에 몇 말씀 드렸습니다. 저는 늘 이런 이야기를 합니다. 우리가 어떤 문제의식으로 불교를 이해하고 실천해야 하는지에 대해 깊이 고민했으면 하는 절실한 마음 때문에 이렇게 이야기를 시작하게 되었네요. 이제 우리가 공부하는 주제로 돌아가겠습니다.

 

그런데, 이것도 조금은 설명하고 들어가야겠군요. <법성게> 아시죠? 다들 들어보셨을 거예요.
우리 민족이 낳은 세계적인 스승, 그 첫 번째가 누구겠어요? (원효스님이요.) 그렇죠. 원효입니다. 그와 동시대를 살았던 의상도 세계적인 인물입니다. 그들을 세계적인 인물이라고 하는 것은 우리끼리 하는 이야기가 아니고 당시 세계의 중심인 당나라에서 나온 평가입니다. 우리나라 사람 어느 누구도 세계무대에서 그들처럼 평가를 받은 사람이 거의 없습니다. 당시 세상의 중심이 어디입니까? 당나라입니다. 원효스님의 사상도, 의상스님의 사상도 당시 당나라에서 대단한 평가를 받았습니다. 당나라에서 평가를 받았다는 것은 오늘날로 치면 미국에서 높이 평가를 받았다는 이야기와 같습니다.
 
원효의 저술은 양이 굉장히 많고 어렵기 때문에 공부하기가 만만치 않습니다. 의상스님의 저술은 그에 비해 많지 않은 편입니다. 그중 대표적인 것이 지금 우리가 공부하고 있는 법성게입니다. 한국의 명작이죠. 하지만 아주 쉽지는 않습니다.

 

한국불교인들이 한국불교를 갖고 공부하고 이야기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우리나라 불교인들은 대부분이 한국불교를 이야기하고 있지 않습니다. 우리가 극복해야 할 중요한 과제입니다.

큰 스님들 법문할 때, 강의할 때, 또는 글을 쓸 때 한 번 보십시오. 1700년의 역사를 자랑하는 한국불교라고 말은 하지만 원효의 저술이라든가 의상의 저술을 가지고 법문을 하고, 강의하고 글 쓰는 분들이 별로 없습니다. 소위 전문가라고 하는 학자 몇 사람이 그들의 저술을 가지고 논문 몇 편 쓰고, 글 몇 편 쓰고 있는 현실입니다. 1700년 역사현장에서 탄생한, 우리 민족이 낳은 세계적 스승의 저술을 가지고 이야기하고 있지 않습니다.

 

따라서 바깥에서 한국불교를 보면 인도불교, 중국불교가 있을 뿐 한국불교는 보이지 않습니다. 우리는 주로 임제나 육조, 또는 달마스님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인도와 중국불교의 아류인 한국불교가 있을 뿐입니다. 그 시대 세계 대중들이 위대한 사상으로 인정했던 원효스님 의상스님의 후손으로서 대단히 죄송스러운 일인 거죠.

 

그리고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우리가 우리답지 못하다는 것이 더 큰 문제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비록 실력은 부족하지만 우리 절에서라도 한 번 한국불교에 대해 이야기해보려고 법성게를 공부해왔습니다. 이제 책을 보겠습니다.

 

노래하네, 그대의 삶을.

 

교재 윗쪽에 있는 ‘설명하네, 그대의 삶을’ - 이것은 원효스님께서 쓴 <화엄경소> 서문의 일부를 옮긴 것입니다. 그리고 그 아래쪽에 법성게가 있습니다. 일반적으로는 ‘법의 성품을 노래하다’ 또는 ‘존재의 본래 성품을 노래하다’라고 번역하는데, 우리는 ‘노래하네, 그대의 삶을’이라고 풀었습니다.

 

우리가 법성게를 선택한 이유는 첫째, 한국불교를 공부하고 이야기하고자 해서입니다. 둘째, 내용이 좀 어렵기는 하지만 압축적이고 짧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어려운 부분이 많습니다. 대표적인 것은 우리는 한글로 사고하는 사람들인데 내용이 한문으로 되어있는 점입니다. 지금 이 책에는 한글로 풀어놓았습니다. 아마도 학문적으로 공부하는 분들이 보면 깜짝 놀랄지도 모르겠습니다. ‘법성게’를 ‘노래하네, 그대의 삶을’이라고 번역했는데, 말도 안 된다고 할지도 모르겠습니다. 원효스님의 <화엄경소> 서문은 ‘설명하네, 그대의 삶을’이라고 풀었습니다. 역시 학자들이 동의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이에 더하여 불조의 뜻을 왜곡하고 불조를 모욕하며 불교전통을 파괴하는 마구니라고 이야기할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렇게 하는 까닭이 있습니다.

 

일찍이 부처님은 “뜻에 의지하고 말에 의지하지 말라”고 유언했습니다. 글자로만 보면 말도 안 된다고 할 법하지만 이야기 뜻으로 보면 그렇지 않기 때문입니다. 부처님은 글자로만 보면 안 된다고 했습니다. 이 말은 우리 속담에 ‘쑥떡같이 말해도 찰떡 같이 알아들어야 한다’는 것과 같겠죠. 반대로 말을 찰떡 같이 했는데 쑥떡같이 알아들으면 문제가 풀리지 않고 계속 꼬이게 된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이해를 돕기 위해 우리가 일상에서 경험하는 구체적인 상황을 예로 들어보겠습니다.
요즘은 좀 다르겠지만 옛날 시골에선 어머니가 밭에서 늦게 돌아와 급하게 나무로 불을 때고 밥을 해야 하는 상황이 많았습니다. 식구들의 배는 고프고 마음은 바쁘고 날은 어두워지고 자식들은 좇다고 쫓아와서 엉겨붙고 귀찮게 하죠. 엄마는 바쁘고 정신이 없는데 철없는 아이들이 매달리니 짜증이 나서 소리를 지르게 됩니다. “야, 이놈아. 저리가. 꼴도 보기 싫어. 어디 가 뒈져버려” 어떻습니까? 여기 계신 분은 그런 기억이 없으신가요?

 

하하하. 없는가 보네. 저는 어릴 때 그런 소리 듣고 살았는데. 재수 없으면 한 대 얻어맞기도 하고. 어머니께서 부지깽이 들고 불을 때다가 “이놈의 새끼!”하고 때리기도 하셨습니다.
만약 어떤 어머니가 “어디 가서 뒈져버려”라고 했는데, 그 말이 진짜 죽으라는 말인가요? 그렇지 않죠. 말은 죽으라는 것인데, 뜻은 죽으라는 게 아닙니다. 뜻이 그게 아닌데도 말 그대로 하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큰 일 나겠죠?

 

그러므로 부처님께서 말의 노예가 되어 말대로 하면, 팔만대장경을 읽어도 독이 되어 우리 삶을 병들게 한다고 말씀하신 겁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그 말에 담겨 있는 뜻을 알고 그뜻에 따라야 하는 거죠. 그뜻을 우리 속담과 연결시키면 ‘쑥떡 같은 말도 찰떡같이 알아들어야 한다’는 이야기가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뜻으로 보면 제 이야기가 맞다고 전 자신 있게 이야기할 수 있습니다. 비록 그렇긴 하지만 여전히 미흡합니다. 적어도 고등학생 정도의 지적 수준이면 이해할 수 있도록 해석하고 설명해내야 하는데 그렇지 못합니다. 글로도 그렇고 말로도 그렇습니다. 지금 이 법성게 한글 해석본은 그런 목표로 만든 것인데 아직도 부족합니다. 그러나 그런 마음으로 만들어진 것임에는 틀림이 없습니다.

 

부처님의 가르침은 두 가지 물음에 대한 답입니다. 그 양이 아무리 많아도 이 두 가지 물음을 벗어나지 않습니다. 인생에 주어진 두 가지 물음, 이것을 우리는 인생의 화두라고 이야기하죠.
첫 번째는 인생이란 무엇인가, 나는 누구인가에 대한 물음입니다. 이 화두를 불교적으로는 ‘나의 본래면목, 본래부처’라고 하죠. 두 번째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어떻게 살아야 괜찮은가, 어떻게 살아야 행복할까 하는 물음입니다.

 

우리가 세상을 살면서 알아야 할 것은 이 두 가지가 전부입니다. 인생화두는 누구나 할 것 없이 반드시 투철하게 붙잡고 풀어내야 하는 절체절명의 과제입니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현실은 온통 일등과 부자 타령에 중독이 되어 인생화두에는 별 관심이 없습니다. 대단히 심각한 문제입니다. 사실 인생살이에서 절실한 과제인 이 인생화두만 잘 풀어내면 다른 건 다 몰라도 괜찮습니다. 다른 것은 그때그때 적당하게 처리하면 될 문제들이지요.

 

우리가 공부하는 법성게도 인생화두에 대한 설명, 인생화두에 대한 해석입니다. 그러므로 제목을 ‘노래하네, 그대의 삶을’이라고 풀었습니다. 인생이란 무엇인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라고 하는 물음에 대한 설명이기 때문에 제목을 이렇게 푼 것입니다. 이 내용을 다른 말로 표현하면 내 생명은 어떻게 이루어져 있을까, 내 생명이 살고 싶은 행복한 삶은 어떻게 살아야 가능할까,로 바꾸어도 됩니다. 이 두 가지 물음에 대해 의상스님은 법성게로 설명을 했고, 그 내용을 그림으로 그린 것이 저 그림인데,  불교적으로는 인드라망무늬라 하고 일반적으로는 생명평화무늬라고 합니다. 법성게에서 말하고자 하는 내용을 그림으로 그린 것입니다. 팔만대장경의 내용도 이 그림에 다 담겨 있습니다.

 

4.

 

자, 그러면 법성게를 읽어봅시다.

 

여기 한 사람 있으니
그의 본래 참 모습은
온 우주 두루두루 어울려
한 번도 나누어진 적 없고
긴긴 세월 흐르고 흘러도
언제나 항상 그 모습이며
본래 정해진 이름도 없고
따로 떨어진 모습도 없으니
오로지 실천하는 지혜로 알뿐
그 밖의 다른 길 있지 않네.
그의 본래 참 모습은
지극히 심오하고 미묘하여
자신을 고집하지 않고
인연 따라 온갖 모습 이루니
하나 안에 일체가 깃들고
여럿 안에 하나가 깃들며
하나가 그대로 일체요
일체가 그대로 하나이며
한 먼지가 온 우주 품어 안고
온 먼지들도 또한 그러하네.
끝없는 영원의 시간이 그대로
지금 여기 한순간이요,
지금 여기 한순간이 그대로
끝없는 영원의 시간이며
과거, 현재, 미래 모든 시간들과
지금 여기 한순간이 함께 있어도
혼란스럽지 않고 질서정연하게
시간마다 따로따로 이루어지네.
참 모습대로 살아갈 마음을 낼 때
바로 그 순간 그대로 정각이니
참 모습 그 자리엔 생사와 열반이
항상 서로 어울려 함께 있고
숨겨진 본바탕과 드러난 모습도
미묘하게 어울려 구별 할 수 없으니
그 경지는 깨달음을 실천하는 사람
붓다와 보현보살의 몫이네.
깨달음을 실천하는 용맹한 사람 능인은
언제나 한결같은 그 자리에 서서
뜻대로 하는 자유자재의 솜씨로
보배를 허공가득 비처럼 내리게 하여
사람들마다 준비한 그릇만큼
온갖 종류의 이익을 얻어가게 하네.
그러므로 붓다행 하는 사람은
본래의 자기 자리로 돌아와
굳이 망상을 쉬려고도 하지 않고
특별한 것을 얻으려고 할 것도 없이
주체적으로 아무 조건 없는
무애자재의 좋은 방편을 써서
집안 살림에 필요한 모든 것을
부족함 없이 충분하게 얻으며
한량없는 공덕을 모두 지닌
끝도 없고 다함도 없는 보배들로
법계의 참다운 우리 세상을
아름답고 빛나게 잘 꾸미네.
그리고 마침내 실제 중도의
평상위에 의연히 앉아
언제나 한결같이 흔들림 없나니
그 사람을 일러 거룩한 붓다라 하네.

 

지금 읽은 것이 법성게의 전부입니다. 그동안 우리는 ‘사람들마다 준비한 그릇만큼 / 온갖 종류의 이익을 얻어가게 하네’까지 공부했습니다. 나머지는 앞으로 해야 할 부분입니다. 오늘 처음 오신 분들이 계셔서 누구에게 맞추어 이야기를 해야 할지 잘 모르겠네요.
(하시던 진도에 맞춰서 하십시오)
그렇게 하는 것이 맞겠죠?
일단 내용을 한 번 봅시다.

 

‘그러므로 붓다행하는 사람은’

 

‘붓다행을 하는 사람’이라는 것은 ‘깨달음을 실천하는 사람’이라는 뜻이죠.
법성게에 보면 ‘초발심시변성정각(初發心時變成正覺)’이라는 구절이 있습니다. 여기서 ‘초발심(初發心)’이라는 말은 ‘참 모습대로 살아갈 마음’으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보통 발보리심(發菩提心), 발심(發心)이라고 표현합니다. ‘나도 부처님처럼 살 거야’, ‘나도 본래면복대로 살 거야’, ‘나도 진리에 따라 살 거야’ 이렇게 마음을 낸다는 것입니다. 즉 깨달음을 실천한다는 이야기입니다.

 

‘초발심시변성정각(初發心時變成正覺)’은 ‘참모습대로 살아갈 마음을 낼 때, 바로 그 순간 그대로 정각이니’라고 해석할 수 있겠죠. 즉 발심하는 그 자체가 바로 정각(正覺)이라는 말입니다.

화엄경에서 말하고자 하는 내용을 한 마디로 요약하면, 바로 ‘초발심시변성정각(初發心時變成正覺)’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화엄경을 압축한 것이 법성게이니, 법성게 내용을 가장 압축한 것이 ‘초발심시변성정각(初發心時變成正覺)’이라고 할 수도 있겠죠.

 

‘그러므로 붓다행 하는 사람은
본래의 자기 자리로 돌아와’

 

이 말이 ‘초발심’입니다. 본래의 자기자리로 돌아와야 정상적인 삶을 살지 않겠습니까? 본래의 자기자리가 어디겠습니까? 본래의 참모습은 무엇이며 본래의 내 자리는 어디일까요?

-- 다음 글에 계속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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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목록

실상사님의 댓글

실상사 작성일

내용이 좀 길어 화면에서 읽는 것이 피로할 수 있습니다.
읽기 편하도록 편집하여 첨부파일을 올렸으니 다운로드하여 보시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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