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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현법회 | [법성게강의] “지금 여기 이 순간 자기 자신”이 본래 자리(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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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실상사 작성일16-05-13 01:42 조회2,754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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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 11. 22. 일요일. 실상사 보현법회


회주 도법스님 법문

 


“지금 여기 이 순간 자기 자신”이 본래 자리 (2)


-- 앞글에서 이어짐


 

5.

 

본래의 참 모습은 그림으로 그리면 저 생명평화무늬가 됩니다. 지금 여기 내 생명은 저렇게 이루어져 있다는 이야기입니다. 지금 여기 나의 진정한 모습은 저렇게 생겼다는 이야기입니다. 지금 저 모습이 바로 우리가 찾아야 할 본래의 참모습이고, 돌아가야 할 본래 자리입니다.


무엇을 하든 본래의 자기 자리에서 해야만 정상적으로 가능한 겁니다. 그런데 우리는 한 번도 본래의 자기자리에 있어 본 적이 없습니다. 그럼 어디에 가 있을까요? 항상 생각을 따라 돌아다니고 있습니다. 계속 망상을 하는 겁니다.

 

구체적으로 한 번 생각해 보겠습니다.


첫째, ‘지금 여기’라는 ‘공간’입니다.
둘째, ‘지금 이 순간’이라는 시간입니다.
셋째, ‘지금 여기 이 순간 자기 자신’입니다.


이 세 가지는 우리에게 공짜로 주어진 것들이죠.

그러므로 첫째, 지금 여기에 주어진 시간, 공간, 자기자신이 본래의 모습입니다.
본인 자신을 돈 내서 만들었나요? 아니잖아요. 본인이 의도했던 의도하지 않았던 지금 본인이 가지고 있는 마음과 몸은 공짜로 주어진 것입니다. 시간과 공간과 존재는 본래 주어진 거예요. 처음부터 나에게 주어진 시간과 공간과 자신이 본래 면목입니다. 우리가 찾아야 할 참모습, 우리가 돌아가야 할 본래의 자리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공간과 시간과 내가 일치해야 되는 겁니다.

 

우리는 지금 실상사에 와있습니다. 지금 나에게 주어진 공간과 시간과 나라고 하는 존재가 일치하고 있는가요, 분열되어 있는가요? 정신 차려 마음먹으면 일치할 수 있습니다. 반대로 정신을 놓고 습관대로 하면 분열됩니다. 정신이 온 천지를 돌아다니게 됩니다. 과거로 갔다가 미래로 갔다가, 하늘로 갔다가 바다로 갔다가 산으로 갔다가, 안으로 갔다가 밖으로 갔다가, 정신없이 분주하게 왔다갔다 합니다. 지금 여기 제 자리에 본래 모습대로 존재할 수가 없습니다. 이렇게 생각과 기억을 쫓아 사는 것을 무지의 삶, 전도몽상의 삶, 중생의 삶이라고 합니다.

 

너와 나는 그물의 그물코처럼 연결되어 있고 서로 의지해서 존재합니다. 아내가 있어야만 남편이 될 수 있습니다. 자식이 있어야만 엄마가 될 수 있습니다. 이 세상 그 누구도 그 무엇도 절대로 분리된 남남일 수 없습니다. 서로 연결되고 서로 의지하여 존재하는 모습이 첫 번째 본래모습입니다.

 

두 번째 본래모습은 끊임없이 변화한다는 것입니다. 만물은 어느 한 순간도 고정되어 있지 않습니다. 마치 바다의 파도처럼, 또는 흐르는 강물처럼 계속 변화하면서 존재합니다. 한 순간도 변화하지 않고 존재한 적이 없습니다. 변화하지 않으면 삶이 불가능합니다. 아이가 어른이 될 수도 없습니다. 우리가 처음 태어나면 한 살이죠? 만약 한 살인 상태로 안 변해도 열 살이 될 수 있습니까? 스무살이 될 수 있습니까? 절대로 될 수 없습니다. 이렇게 살펴봤듯이 변화가 두 번째 참모습입니다. 끊임없이 변화합니다.

 

실상이 그러한데도 우리는 본인에게 좋고 중요한 것은 절대로 변화하면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영원이 그대로이어야 한다고 믿습니다. 그러면 나에게 제일 좋은 것이 무엇일까요? (내 목숨이요) 그렇습니다. 내 목숨이, 내 생명이죠. 우리는 실상과 관계없이 죽기살기로 안 죽고 살려고 합니다. 죽기살기로 나만 살려고 합니다. 죽기살기로 내 마음대로 하려고 합니다. 죽기살기로 나 편한대로 하려고 합니다. 이것이야말로 실상에 어긋나는 망상입니다. 현실적으로 이루어질 수 없은 것을 이루어진다고, 이루어져야 된다고 믿고 사는 삶을 무지의 삶, 전도몽상의 삶, 중생의 삶이라고 합니다. 고통과 불행이 삶이 됩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직면한 현재의 실상을 보아야 합니다. 생각, 말, 기억 즉 관념으로 현실을 보는 습관에서 벗어나 직면한 현실을 사실적으로 보고 다루어야 합니다. 이해를 돕기 위해 한 구절 한 구절 짚어보겠습니다.

 

‘붓다행하는 사람은
본래 자기 자리로 돌아와’

 

‘붓다행 하는 사람은’을 다른 말로 하면 뭐라 할 수 있을까요? ‘불교를 하는 사람’이라고 할 수도 있겠죠? 달리 말하면 ‘불교를 제대로 하려면’, ‘불교를 통해서 인생을 제대로 살고 싶다면’ 이런 의미로도 말할 수 있겠습니다.

 

‘본래 자기 자리로 돌아와’ - 앞에서 말했듯이 ‘본래의 자기 자리’라는 것은 공간적으로는 ‘지금 여기’, 시간적으로는 ‘지금 이 순간’, 그리고 ‘지금 여기 이 순간 존재하는 자기 자신’을 말합니다. ‘본래의 자기 자리로 돌아’온다는 것은 지금 여기 이 순간 자기 자신으로부터 시작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밖에 어디에서도 해답이 나올 수 없다는 이야기입니다.

 

전통적으로는 ‘즉심즉불(卽心卽佛)’, 즉 ‘마음이 곧 부처’라고 했습니다. 부처라는 말이 무슨 뜻입니까? 모두 완성되었다는 의미입니다. ‘부처’라는 말 속에는 모든 것이 다 이루어졌다, 모든 것이 다 해결되었다, 이만하면 충분하다, 이것이 세상의 최고요 전부다,라는 의미가 다 포함되어 있습니다.

 

그러면 마음이 곧 부처라는 이야기는 무엇입니까? 공간과 시간과 존재가 이미 본인에게 주어져 있으니 그것을 제대로 잘 알고 제대로 잘 쓰기만 하면 된다는 이야기입니다. 불교를 하는 사람들은 이미 주어져 있는 본래 자기 자리, 그러니까 지금 여기 이 순간 자신으로 돌아와야 합니다. 나에게 주어져 있는 공간이 어떤 것인지, 시간이 어떤 것인지, 존재가 어떤 것인지 제대로 알아야 합니다.

 

‘굳이 망상을 쉬려고도 하지 않고’

 

마음이 부처라는 말은 망상이란 본래 없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망상이 있으면 부처가 아닌 거죠. ‘본래 자기 자리로 돌아와’ - 자기 자리로 돌아오면 망상은 저절로 없어지게 되어 있습니다. 망상으로부터 자유로운 자리가 본래 자리예요. 또는 망상이 생기기 이전 자리가 본래 자리입니다. 달리 말하면 본래 자리에 있기만 하면 망상은 저절로 사라진다, 망상으로부터 저절로 자유로워진다, 망상은 본래 없는 것이다 등등 이런 표현이 모두 가능합니다.

 

왜 그럴까요? 망상은 본래 없는 것인데, 다만 무지와 착각의 관념에 의해 허깨비처럼 환상으로 생겨난 것입니다. 실제 있는 것이 아니죠. 생각으로 조작해낸 것일 뿐입니다. 그러므로 존래의 자리로 돌아가는 순간 바로 망상으로부터 자유로워진다, 또는 망상은 사라진다고 이야기할 수 있는 거죠. 그러므로 굳이 망상을 쉬려고 할 것도 없고, 제거할 것도 없이 제 자리에 있기만 하면 된다고 하는 것입니다. 

 

‘특별한 것을 얻으려고 할 것도 없이’

 

우리는 모자라니까, 부족하니까, 못마땅하니까, 특별한 무엇인가가 있어야만 충분해질 것이라고 생각하고 자꾸 무엇인가를 얻으려고 노력하잖아요. 그런데 앞에서 뭐라고 했습니까. ‘마음이 부처’라고 했습니다. 마음이 부처라는 이야기는 사람이 부처라는 이야기입니다. 마음이 부처라는 말은 누구나 부처라는 말입니다. 마음이 없는 사람은 없잖아요. 부처인데 뭐가 부족합니까? 부족하면 그것은 부처가 아닙니다. 부처라는 말은 원만구족하다는 이야기입니다. 원만구족하다는 말은 다 갖추어졌다, 충분하다, 완전하다는 말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당연히 특별한 다른 무엇을 하거나 얻으려고 할 필요가 없습니다.

 

본래부처라는 말을 들어보셨죠? 아마 한국불교에서 가장 많이 강조하는 말 중의 하나일 겁니다. 본래부처라면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부처를 구하는 것이 맞습니까?
(맞지 않습니다.)

 

그런데 희한하게도 우리는 본래부처라면서도 자꾸 부처되어야 한다고, 부처를 이루어야 한다고 합니다. 말이 안 되죠? 본래부처인데 다시 부처되려고 무엇인가를 하는 것이 바로 망상입니다. 본래부처가 아니라면 부처되기 위해 무엇인가를 하는 것이 맞고 말도 되죠. 그렇지만 본래부처라면 다시 부처되라고 하거나 부처되려고 하는 것은 망상이고 쓸데없는 짓인 셈이죠.

 

바로 이런 망상들을 일컬어 옛 스님들은 ‘소를 타고 소를 찾고 있네’라고 냉소하고 있는 것입니다. 소를 타고 있는데 어디 가서 소를 찾겠습니까? 찾을래야 찾을 수 없고, 이것은 본인이 소를 타고 있다는 사실을 알면 그것으로 끝입니다. 그러니 본래부처라고 하면서 계속 부처되어야 한다고 말하는 오늘의 한국불교는 대단히 모순에 빠져있다고 하겠습니다.

 

주체적으로 아무 조건 없는
무애자재의 좋은 방편을 써서
집안살림에 필요한 것을
부족함 없이 충분하게 얻으며

 

본래 제 자리로 돌아가 주어진 것을 본인이 필요한 대로 쓰기만 하면, 즉각즉각 이루어진다는 이야기입니다. 어떻게 해서 그렇게 될까.
첫째, 세상이치가 그렇기 때문입니다. 욕심대로는 절대 안 되지만 이치대로는 반드시 되도록 되어 있습니다. 망상대로는 절대 안 되지만 진리대로는 틀림없이 된다는 이야기입니다.
둘째, 인간은 인연의 법으로 이루어진 존재, 인연의 법칙으로 태어난 존재입니다. 따라서 이치대로 되는 존재입니다. 이치대로 하기만 하면 틀림없이 되는 존재입니다. 달리 말하면 인간은 행위하는 대로 되는 존재입니다. 내가 전생에 죄를 많이 지어서 이곳에 태어났다고 하더라도 지금 여기에서 도둑질을 하지 않았다면 도둑놈이 아닙니다. 내가 금생에 도둑질을 한 번도 안했는데도 전생의 죄 때문에 도둑놈이 될까요?
(안됩니다.)


그렇죠. 전생에 맨날 도둑질만 했다고 해도, 지금 도둑질을 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인간은 진리대로 태어난 존재이기 때문에 진리대로 됩니다. 인간의 진리는 무엇입니까? ‘행위하는 대로 된다’는 것입니다. 훔치면 뭐가 돼요? 즉각 도둑놈이 됩니다.

 

어디 가서 강의를 하면 사회자가 제 소개를 하는데, 강의하는 연사니까 나쁜 이야기는 안하겠죠? 당연히 좋은 이야기만 합니다. 훌륭한 사람이라고 이야기합니다. 그것이 사실이라고 칩시다. 모든 사람이 “도법스님은 훌륭해”, 그렇게 알고 믿는다 치더라도 여기서 제가 도둑질 하면 무엇이 됩니까. (도둑이요~) 그렇습니다. 도둑놈입니다. 훌륭하다는 소개도 그 어떤 주장도 다 부질없는 것입니다. 실제 행위를 어떻게 하느냐가 중요합니다.

 

한 가지만 더 생각해볼까요? 두 사람이 있는데, 한 사람은 “기독교가 제일이야”라고 주장하고 다른 한 사람은 “불교가 제일이야”라고 주장한다고 합시다. 그런데 기독교가 제일이라고 하던 사람은 도둑질을 안 했고, 불교가 제일이라고 했던 사람은 도둑질을 했다고 칩시다. 그러면 누가 더 불교적인 사람이겠습니까? (도둑질을 안 한 기독교인이요~)

 

그렇지요?

항상 말하지만 부처님은 부처님 믿으라고 하지 않았습니다. 도둑질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왜? 도둑질을 안 해야 도둑놈이 안 되기 때문입니다. 도둑질 하지 않으면 어떻게 되죠? 감옥에 가지 않죠. 감옥에 가면 고통스러운데 감옥에 가지 않으니 그 삶이 편안하고 자유롭겠죠.

 

인간은 진리대로 태어난 존재이기 때문에 진리대로 됩니다. 행위하는 대로 되는 존재이기 때문에 행위하는 대로 됩니다. 달리 말하면 법대로 살면 됩니다. 왜 그럴까요? 법이 그렇게 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지금 여기 나에게 주어진 공간과 시간과 자신을 내가 의도한 대로 쓰기만 하면 쓰는 대로 즉각즉각 뜻한 바가 실현됩니다. 나에게 주어진 공간을 평화롭게 쓰면 무슨 공간이 됩니까? 평화로운 공간이 됩니다. 개떡같이 쓰면 개떡같은 공간이 됩니다. 나에게 주어진 시간을 평화롭게 쓰면 어떤 시간입니까? 평화로운 시간입니다. 개떡같이 쓰면 개떡같은 시간이 됩니다. 나에게 주어진 몸과 마음을 평화롭게 쓰면 무엇이 됩니까? 평화로운 인간이 됩니다. 개떡같이 쓰면요? 개떡같은 인간이 됩니다. 이 사실은 너무나 명명백백한 실제입니다. 이 내용을 법성게는 어떻게 설명하고 있는지 보겠습니다.

 

그러므로 붓다행 하는 사람은
본래의 자기 자리로 돌아와
굳이 망상을 쉬려고도 하지 않고
특별한 것을 얻으려고 할 것도 없이
주체적으로 아무 조건 없는
무애자재의 좋은 방편을 써서

 

여기서 ‘좋은 방편을 쓴다’는 것은 잘 활용한다는 뜻입니다. 시이기 때문에 대단히 압축되어 있습니다. 설명을 보태면 너에게 주어진 공간과 시간과 너 자신을 온갖 좋은 수단을 이용해서 주체적으로 잘 쓰면 된다는 뜻입니다.

 

집안 살림에 필요한 모든 것을
부족함 없이 충분하게 얻으며

 

집안 살림에 필요한 것이 무엇입니까? 다 드릴 수 있습니다. 필요한 것 다 이야기해보세요. 70억 인구가 다 이야기해도 다 줄 수 있습니다. 70억 인구가 집안에 꼭 필요한 것이 무엇일까요? 그것은 평화와 행복입니다. 안 그렇습니까?

“우리 집에 냉장고는 없어도 평화와 행복만 충만하면 난 충분해”
이런 이야기가 말이 될까요, 안 될까요?
(됩니다.)
“돈은 없어도 정말 평화롭고 행복하기만 하면 돼”
“권력은 없어도, 명예가 없어도 평화롭고 행복하기만 하면 난 충분해”
말이 될까요, 안 될까요?
(말이 돼요.)

그렇습니다. 평화와 행복이 우리 살림에 필요한 것입니다. 나에게 주어진 본래모습인 공간, 시간, 자신을 본래모습답게 잘 쓰기만 하면 평화롭고 행복할 수 있습니다.

다시 한 번 읽어보겠습니다.

 

그러므로 붓다행 하는 사람은
본래의 자기 자리로 돌아와
굳이 망상을 쉬려고도 하지 않고
특별한 것을 얻으려고 할 것도 없이
주체적으로 아무 조건 없는
무애자재의 좋은 방편을 써서
집안 살림에 필요한 모든 것을
부족함없이 충분하게 얻으며

 

지금까지 설명해드린 내용이 이 내용입니다. 좀더 쉽게 풀어야 하는데 글이 너무 길어지니까 최대한 너무 길어지지 않도록 하려고 한 것이 지금의 모양을 갖게 되었다고 봅니다.

 

6.

 

이제 정리하겠습니다.
인간은 행위하는 대로 된다. 지금 나는 평화로운 인간이 되고 싶어. 그렇다면 어찌해야 되겠습니까? 물론 상황에 따라서 기도를 해야 하는 경우, 절을 해야 하는 경우, 참선을 해야 하는 경우 등 여러 가지가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런 것은 이차적인 문제이고, 일차적으로는 지금, 여기에서 어떻게 행위하느냐가 중요합니다. 이치에 맞게 행위해야 합니다. 이치에 맞게 하는 것은 어떻게 하는 것인가.

 

인간은 그물의 그물코처럼 관계로 이루어진 존재입니다. 보통 연기적 존재라고 이야기합니다. 우리는 어떤 형태로든 무엇인가를 상대하고 살아가게 되어 있습니다. 내가 누군가를 상대할 때 상대방이 나한테 함부로 하거나 욕을 해도, 심지어 내가 가진 좋은 물건을 훔쳐갔다 치더라도 정신 바짝 차려서 ‘나는 평화롭게 대할 거야’, ‘평화롭게 말한 거야’, ‘평화롭게 행동할 거야’라고 작심하는 겁니다. 그래서 평화롭게 대하고 말하고 행동했습니다. 어떻게 될까요? 그때 나는 평화로운 인간이 됩니다.


인간이란, 주체적인 의도로 행위 하기만 하면 즉각 뜻한 바가 이루어집니다. 그 결과는 바로 확인됩니다. 지금 내가 도둑질 했는데, 나중에 도둑놈 되는 법은 없습니다. 그 순간 바로 도둑놈이 됩니다. 왜 그럴까요? 세상의 이치, 인간의 진리가 그렇게 되도록 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부처님의 가르침이 명쾌하고 탁월하고 영험하다고 하는 겁니다. 영험하다는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나는 평화로운 사람이 될 거야’하고 마음 먹고 평화롭게 대하고 말하고 행동합니다. 어떻게 될까요? 즉각 평화로운 사람이 됩니다. 영험이란 바로 나타는 것입니다. 바로바로 효과가 나타나야 영험한 것이죠. 많은 사람들이 내생 타령, 전생 타령하는데, 불교는 그렇게 가르치지 않습니다.

 

다시 한 번 생각해봅시다.
‘나는 겸손한 사람이 되고 싶다’고 마음 먹었는데, 상대방이 나한테 오만방자하게 굴어요 그렇다고 하더라도 ‘나는 겸손한 인간이 될 거야’하는 마음으로 죽을 힘을 다해서 겸손하게 대하고 말하고 행동합니다. 그러면 어떻게 될까요? 즉각 겸손한 인간이 됩니다. 이렇듯 즉각즉각 이루어지기 때문에 영험하다고 하고, 부처님이 가피했다고 합니다.
어때요? 이래야 할 맛이 나지 않겠습니까? 불교는 너무나도 명쾌한 거예요.

 

7.


이제 인드라망 무늬를 봅시다.(위 그림참조)
이제 우리 신도님들은 다 아시죠? 저 그림의 아래쪽이 사람입니다. 오른쪽이 네 발 달린 짐승, 왼쪽이 새와 물고기, 사람 머리 위쪽이 숲, 나무, 식물, 그리고 해와 달입니다. 온우주 삼라만상을 아주 단순화시켜서 사실적으로 표현했습니다.

 

원불교의 일원상 아시죠? 이 인드라망무늬를 추상적으로 표현하면 원상이 됩니다. 우주의 진리를 뜻하는 원상을 통해서 말하고자 하는 사실적이고 구체적인 내용을 표현한 것이 이 인드라망무늬입니다. 가운데 있는 것은 조계종을 나타내는 삼보륜이죠. 삼보륜은, 첫째 원의 정신을 잘 알고 살아간 사람, 알고 사니까 그 인생이 괜찮았던 사람, 그 분이 누구입니까? (부처님이요) 그렇죠. 부처님입니다. 둘째 부처님은 이치를 알고 이치대로 살면 괜찮다고 가르쳐주셨죠. 그것이 법입니다. 셋째 부처님 가르침에 따라 세상의 이치를 알고 이치대로 살아서 본인도 괜찮게 살고 세상도 괜찮은 삶이 가능하게 하겠다고 실천하는 사람들의 무리를 무엇이라고 합니다. 승가입니다. 일반적으로 불법승 삼보라고 합니다. 원의 사상과 정신을 알고 살아서 괜찮게 된 사람이 불보, 부처님이 가르쳐 준 내용을 법보, 그 내용대로 삶을 살고 역할을 해서 나도 좋고 너도 좋고 우리 모두 좋도록 실천하는 사람들의 집단을 승보라고 합니다.

 

저 그림은 그물의 그물코를 생각하면 이해하기가 쉽습니다. 그리고 저 그림의 내용을 알고 그대로 사는 사람을 부처라고 합니다. 그가 누구든지 그렇습니다.
우리가 나쁜 것을 의도적으로 추구하지는 않습니다. 나는 평화로운 사람이 될 거야, 나는 겸손한 사람이 될 거야, 나는 고귀한 사람이 될 거야, 나는 너그러운 사람이 될 거야, 따뜻한 사람이 될 거야, 하고 본인이 원하는 대로 행위하기만 하면 즉각 그 삶이 이루어지는 존재가 인간입니다.

 

한 번 생각해봅시다. 자신이 진실한 사람, 겸손한 사람, 평화로운 사람, 자애로운 사람, 너그러운 사람, 소박한 사람, 따뜻한 사람, 아름다운 사람, 만족한 사람이 된다면, 어떻습니까? 그 정도면 부처라고 할만하지 않을까요? 본인이 원하는 대로 다 이루어진 삶이면 성공한 삶이잖아요.

 

인간이 그런 존재이기 때문에 매순간순간 작심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매 순간순간 정신 바짝 차려서 작심하고 실천하는 것이죠. 하고, 또 하고, 또 하고, 또 하면 저절로 무르익어집니다. 그렇게 무르익어진 삶을 사는 사람을 일러 정각자라고 합니다. 지금 우리 같은 사람이 ‘초발심’이라면, 하고 또하고, 또 하고, 또 함으로써 자연스럽게 저절로 되는 사람을 ‘정각자’라고 합니다. 서툰가 익숙한가가 다를 뿐 내용은 처음과 과정과 도달점이 다르지 않습니다.

 

우리는 어떤 때는 상대방이 욕을 해도 마음 먹고 평화롭게 말하고 행동합니다. 그런데 그러다가도 어느 순간 참지 못하고 또 화를 내기도 합니다. 그래도 또 마음 먹고 하고, 또 하고, 또 해야 됩니다. 반면 부처님은 우리와 달리 꾸준한 연마를 했으므로 무르익어서 마음먹은 대로 잘 되는 분입니다. 부처님과 우리의 차이는 다만 서툰가 익숙한가의 차이만 있습니다.

 

끝으로 말씀드리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요즘 제가 하는 사업을 소개할까 합니다. 원효스님의 삶을 소설로 쓴 <발원-요석 그리고 원효>라는 책이 나왔습니다. 조계종 화쟁위원회에서 화쟁사상과 문화를 가꾸기 위해 불교신문과 공동기획한 책입니다.

 

발원은 ‘발심’과 ‘서원’의 줄임말입니다. 발원이라는 말 속에 오늘 이야기하고자 하는 내용, 그리고 <화엄경>의 내용이 다 담겨 있습니다. 발심과 서원의 삶을 사는 것이 곧 부처로 사는 것이고 그렇게 사는 사람이 부처입니다. 소설 <발원>은 본래부처의 삶을 살아가는 요석과 원효에 대해 재미있게 내용있게 굉장히 잘 썼습니다.

 

한국불교인들이 이 책을 읽고 여성불자는 요석처럼, 남성불자는 원효처럼 삶을 살고 역할을 한다면 모든 불교인들이 대단히 멋있는 불자가 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총무원장이 누가 되든지 상관없이 한국불교가 부쩍 수준이 높아지고 한국사회의 등불이 될 수 있겠다는 확신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 특히 불자들로 하여금 발원을 많이 읽게 하는 것이 불교발전을 위해 대단히 바람직하겠다는 뜻으로 조계종단에서 <발원> 독후감 공모전을 합니다. 많이 참여해주십시오. 요즘 <발원>을 많이 읽자고 홍보하는 것이 저의 사업입니다.

 

8. 질문과 답변

 

질문 : 기독교에서 말하는 원죄라는 것을 불교의 관점에서는 어떻게 봐야 할까요?

 

태어날 때부터 죄인으로 태어난다고 하는데 사람들이 본래부처라는 것을 받아들이겠습니까. 연기적으로 이루어진 존재를 본래부처라고 보면 원죄는 본래 있는 것이 아니죠. 원죄론을 불교적으로 보면 무명(無明)이라는 것과 연결이 될 듯합니다. 무명이라는 것은 본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무명은 지금 여기 직면해있는 존재의 참모습에 대한 무지와 착각에서 비롯됩니다. 본래 있는 것이 아니고 인간의 무지로 만들어진 것입니다. 본래 참모습에 대한 무지와 착각을 무명이라고 표현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불교적으로 보면 죄는 본래 없었는데 무지 때문에 생겨났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래서 본래부처라는 말을 쓰는 겁니다. 지금 여기에서 본래부처임을 모르는 것이 무명입니다. 교리적으로는 사성제를 모르는 것을 무명이라고 한다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질문 : 자성을 깨우치면 견성이라고 하는데 오늘 이야기를 자성으로도 이야기할 수 있지 않을까요?

 

2600여년 동안 곳곳에서 불교용어가 만들어지고 사용되어 왔기 때문에 대단히 복잡합니다. 용수보살의 <중론>에서는 자성을 철저하게 부정합니다. 자성을 인정하게 되면 연기론을 부정하게 되므로, 그것은 불법을 부정하는 삿된 소견이라고 용수보살은 주장합니다.

 

한국불교에서는 자성이라는 말도 여러 가지로 사용됩니다. “자성을 알아야 돼”, “자성을 깨달아야 돼”라고 긍정적으로 좋게 쓰이곤 합니다. 그 용어는 쓰임에 따라 다양한 의미로 사용되고 있기 때문에 맥락에 따라 이해하고 사용할 한 마디로 단정할 수 없습니다. 다만 굳이 다른 말로 하자면 ‘불성’이라는 말로 표현하는 것이 적절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불성이라는 말은 본래부처라는 말로 표현해도 괜찮다고 봅니다.

 

그런데 자성이라는 개념은 대단히 문제가 있는 개념입니다. 오해의 소지가 많습니다. ‘자성(自性)’은 ‘스스로 존재하는 것’의 의미입니다. ‘자(自)’는 ‘본래부터’라는 의미도 있습니다. 그렇게보면 ‘본래부터 스스로 존재하는 것’이라는 의미가 됩니다.

 

그런데 불교에서는 인연화합으로 이루어지지 않고 본래부터 스스로 존재하는 것은 없다고 봅니다. 본래부터 홀로 또는 스스로 존재하는 것이 없다는 것이 불교의 사유방식입니다. 모든 존재는 인연화합을 이루어졌다, 어떤 것도 인연화합으로 이루어지지 않은 것은 없다고 보는 것이 불교적 사유의 기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스스로 존재하는 것이 있다고 보게 되면 기독교의 사고방식이 되고 맙니다.

 

기독교의 신은 스스로 존재하죠. 본래부터 존재한다고 해석해도 마찬가지죠. 신은 본래부터 존재한다는 말을 다르게 말하면 영원히 변하지 않는 것, 영원히 파괴되지 않는 것이라는 이야기가 됩니다.

 

그런데 불교에서는 영원히 파괴되지 않는 것은 없다고 이야기합니다. 계속 변화한다고 이야기합니다 그러니 완전히 다른 내용이 되어 버립니다. ‘자성’이라는 개념은 쓰임에 따라 괜찮은 경우도 있지만 불교적으로 보면 불교를 또는 삶을 왜곡시킬 위험성이 많습니다. 그러므로 조심스럽게 보아야 합니다. 똑같은 개념이라고 하더라도 여기서는 괜찮은데 다른 곳에서는 문제가 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분명한 것은 이 세상에 변하지 않는 것이 있다면 ‘변한다’는 사실만 변하지 않는다고 봅니다. ‘세상에 변하지 않는 것은 없다’는 사실, 이 진리만 변하지 않는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2015.11월법문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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