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귀의와반야심경 1강(1) 삼보의 내용과 정신의 생활화가 불교수행(1) > 법회와 설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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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현법회 | 삼귀의와반야심경 1강(1) 삼보의 내용과 정신의 생활화가 불교수행(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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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실상사 작성일16-05-13 02:25 조회2,056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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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3월 실상사 보현법회 회주 도법스님 법문

 

삼보의 내용과 정신이

실제 생활이 되도록 하는 것이 불교수행

 

나 하나 꽃 피어 / 풀밭이 달라지겠느냐고 / 말하지 말아라

네가 꽃 피고 나도 꽃 피면 / 결국 풀밭이 온통 / 꽃밭이 되는 것 아니겠느냐.

나 하나 물들어 / 산이 달라지겠느냐고도 / 말하지 말아라.

내가 물들고 너도 물들면 / 결국 온 산이 활활 / 타오르는 것 아니겠느냐.

- 법문 전에 부른 노래 <나 하나 꽃 피어>

 **************

오늘부터 삼귀의와 반야심경을 가지고 공부하기로 했습니다. 불교는 깨달음의 종교라고 이야기를 합니다. 그래서 우리가 깨달아야 된다는 이야기를 참 많이 합니다. 또 깨달은 분을 도인이라고 하며 그 분을 추앙하기도 합니다. 그런데 제가 실제로 공부를 해 보면 불교가 어렵고 혼란스럽습니다. 다른 사람들도 대부분 그렇다고 합니다. 불교를 하고 있는 우리 현실이 답답하고 안타깝습니다.

조금 전에 들어오면서 노래를 들었는데 나 하나 꽃 피어 뭐가 달라지겠냐그런 이야기네요. 풀밭과 꽃밭. 꽃이 피어야 풀밭이 달라진다고 생각하는 거잖아요. 꽃이 피면 풀밭이 달라지겠죠. 풀밭에 꽃이 피면 뭐가 됩니까? 꽃밭이 되는 거죠. 우리 모두 그렇게 생각하고, 그것이 맞고 좋은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에 대해 아무도 의심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부처님은 좀 달리 생각한 것 같습니다. 그에 대해 의심을 품은거죠. ‘정말 풀밭이 꽃밭 되면 좋을까?’하고. 어떻습니까? 풀밭이 꽃밭 되면 정말 좋을 것 같습니까? 풀밭 말고 꽃밭이 따로 있는 걸까요? 또는 꽃 피지 않는 풀이 있는 걸까요?

풀밭을 꽃밭으로 만드는 것이 너무나 당연히 좋은 것 같이 들리지만 하나하나 앞뒤를 따져보면 어떻습니까? 평소 우리가 뭔가를 놓치고 있다는 생각이 들지 않습니까. 물론 예외의 경우가 있을지 모르지만 일반적으로 꽃 안 피는 풀은 없습니다. 어쩌면 모든 풀이 꽃을 피운다고 할 수 있습니다.

있는 사실을 확인해보면 풀밭이 그대로 꽃밭인 셈이죠. 따라서 풀밭을 없애고 꽃을 심어 꽃밭을 만드는 것만이 능사라고 할 수 없는 측면이 있는 거죠. 들어올 때 노래를 들으면서 문득 그런 생각을 했습니다. 현실을 잘 관찰해 보면 풀 한포기, 한 포기가 다 꽃입니다. 화엄경에선 모두 부처라고 합니다. 어디 풀 뿐이겠어요? 세상에 있는 온갖 것들이 다 부처 아닌 것이 없다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달리 이야기 하면 세상에 꽃 아닌 것이 없다는 이야기이죠.

여하튼 우리는 꽃을 좋아합니다. 그러기 때문에 가장 좋은 것, 아름다운 것, 소중한 것을 꽃이라고 표현합니다. 더 설명을 하면 대단히 소중하다, 대단히 곱다, 대단히 고맙다, 이런 내용을 우리는 꽃이라는 말로 표현하고 있는 셈이죠.

그렇다면 어떻습니까? ‘세상에 꽃 아닌 것이 없다’, ‘온갖 풀이 다 꽃이다라고 하는 말이 사실이라면 그래도 반드시 꽃밭을 따로 만들어야 되겠습니까, 꼭 그렇지 않죠. 오히려 이미 있는 풀꽃들의 아름다움을 발견하고 누리는 것이 훨씬 더 좋을 수 있잖아요. 만일 풀꽃 한포기 한포기의 아름다움을 발견하고 즐길 수 있다면 날마다 곳곳마다 좋은 곳, 좋은 날이 될 수 있으니 얼마나 대단합니까.

사실 붓다의 본의는 지금여기 있는 사실이 갖는 가치를 발견하도록 하고자 하는데 있습니다.새로 뭘 자꾸 만들고 보태자고 하는 것이 불교가 아닙니다. 있는 사실을 잘 보면 이 세상에는 우리가 생각하는 최고 좋은 것, 최고 아름다운 것, 최고 귀한 것이 그 안에 다 있다고 이야기합니다  

좋은 것이 이미 다 있으니까 그 내용을 잘 알고 그것을 적재적소에 잘 쓰면서 살면 된다고 합니다. 이렇게 알고 실천하는 것을 불교에서는 깨달음이라고 이야기 합니다. 그렇게 알고 실천하면 그 삶이 괜찮아진다는 이야기를 하는 것이 불교입니다.

불교가 시작된 지 2600년이라는 세월이 흘렀습니다. 그 사이 세상 곳곳에서 무수한 스님들과 불자들이 사람들을 상대로 붓다의 가르침을 설명했고 그것들을 기록했기 때문에 내용이 너무나 다양합니다. 그야말로 천차만별의 불교가 있는 것이죠. 천차만별의 불교가 있다 보니 옛날엔 좀 단순했는데 뒤로 올수록 훨씬 복잡해지고 혼란스럽고 어려워졌습니다. 그러므로 해도 해도 잘 모르겠고 되는 것 같기도 하고 안 되는 것 같기도 하고 아는 것 같기도 하고 모르는 것 같기도 하고 뭔가 석연치 않은 것이 우리 현실입니다.

우리가 지난해에는 의상스님이 저술한 법성게를 가지고 한 달에 한 번씩 공부를 했습니다. 올해도 다른 것을 하기 보다는 법성게를 가지고 좀 더 세밀하게 구체적으로 심화시키는 것이 훨씬 더 좋겠다고 판단했습니다. 하지만 새로운 내용이 필요하다는 요구들이 있어서 결국 일상에서 제일 익숙한 삼귀의와 반야심경을 가지고 공부하기로 했습니다.

 삼귀의는 너무나 잘 아는 이야기이죠. 우리가 불교하면 수행의 종교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수행이라고 하면 주로 절을 하거나 참선을 하거나 기도하는 것을 떠올립니다. 물론 전통적인 수행을 지극하게 해야 합니다. 그런데 그것만이 전부라고 생각해선 안 됩니다.

 팔만사천법문을 모두 압축하고 또 압축해서 보면 삼보에 대해 제대로 알고 실천하면 그것이 불교수행이다라는 말로 요약할 수 있습니다. 삼보에 대해 제대로 알고 아는 대로 삶을 살아가면 사는 것이 괜찮아 집니다. 사는 것이 괜찮아지면 되는 거잖아요. 인생 살만하다, 그러면 괜찮은 거잖아요.

우리는 삼보에 대해 너무나 잘 알고 있지만 그것이 불교 수행의 전부라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런 평범한 것 말고 특별한 다른 무엇인가를 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마치 우리가 풀밭을 떠나 다른 곳에서 특별한 꽃밭을 찾는 것과 비슷한 거죠. 사실 풀밭을 떠나 꽃밭이 따로 있을 수 없습니다. 사실은 풀밭이 그대로 꽃밭이죠. 그런데 불행하게도 우리는 이 사실을 잘 모릅니다. 없애버려야 할 풀이 따로 있고 보호해야 할 꽃이 따로 있다고 생각하는 거죠. 본래 평등한 것을 우리가 차별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꽃의 실상에 대한 무지로 풀은 나쁘고 꽃은 좋은 것이라고 차별하고 있는데 주의기우려 꽃의 실상을 잘 관찰해보면 꽃 아닌 풀이 없습니다. 소중하지 아니한 풀, 예쁘지 아니한 풀이 없습니다. 그러니까 사물 하나하나가 갖는 그 소중한 가치를 발견해 내는 것이 중요합니다. 존재가치를 잘 알고 실천하는가 그렇지 않은가가 내 삶이 괜찮을지 아닐지를 좌우합니다. 일상에서 낱낱 존재의 가치를 발견하고 그것을 삶으로 실천하는 것을 불교에서는 깨달음이라고 합니다.

그런 차원에서 보면 깨달음을 실천하는 것이 불교 수행인 것이죠. 그렇게 접근해야 깨달음과 수행, 수행과 일상의 삶이 통일 될 수 있습니다. 깨달음과 수행, 수행과 삶이 통일 되는 길을 만들어 가고자 불교인들에게 가장 익숙한 삼귀의를 주제로 이야기를 해 보려고 합니다.

  이 그림이 모두 보이십니까?(위 그림 참조)

일단 그림 설명을 하고 다음 설명을 할까 싶네요. 제일 밑에 있는 것이 사람입니다. 사람 같이 보이죠? 오른쪽은 무엇처럼 보입니까? 네발 달린 짐승입니다. 왼쪽은 새와 물고기입니다. 사람 머리 위쪽에 붙어 있는 것이 나무와 숲, 그러니까 식물입니다. 그리고 해와 달. 온 우주의 삼라만상을 그림으로 표현했습니다.

 이 그림이 말하고자 하는 것이 무엇일까요? 사람들은 누구나 할 것 없이 원초적으로 인간이란 무엇인가? 나는 누구인가? 하는 질문을 가지고 있습니다. ‘나는 누구인가, 인생이란 무엇인가하는 물음을 불교인들은 나의 본래면목’, ‘인생의 본래면목’, ‘나의 진면목’, ‘인생의 진면목’, 또는 나의 참 자아’, ‘인생의 참 자아라고 합니다.

아마 큰 스님들로부터 본래 면목을 찾아야 한다’, ‘본래 면목을 깨달아야 한다고 하는 법문을 많이 들었을 겁니다. 지금 함께 보고 있는 이 그림은 우리가 찾아야할, 알아야할, 깨달아야할 나의 본래 면목, 나의 참 자아라는 말로 표현되어지는 내용을 그림으로 표현한 겁니다. 화엄경에서는 이 그림이 말하고자 하는 내용을 본래부처라고 합니다. 그러니까 저 그림은 본래부처를 그림으로 표현한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부처와 우리는 본래 모습이 똑같습니다. 저 그림과 같은 모습이에요. 석가모니 부처님도 저 모습이고, 지금 나도 저 모습입니다. 다른 것이 아무것도 없습니다. 다만 다른 것이 있다면 부처님은 저것이 자기 자신의 본래면목임을, 참 자아임을, 진면목임을 아주 확실히 압니다. 어떤 상황에서도 흔들리지 않고 확고하고 투철하고 명확하게 털끝만큼의 의심도 없이 알고 살아갑니다. 그 사람을 부처라고 하는 겁니다. 털끝만큼의 의심도 없이 저것이 나의 본래면목이다, 진면목이다, 나의 참 자아다 이렇게 알고 사는 사람이 부처인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어떻습니까? 저 그림이 자신의 진면목, 참 자아라는 것을 아시나요? 우리는 그에 대해 무지하고 의심이 많습니다. ‘정말 그럴까?’하고 의심 하는 거죠. 아주 단순화시키면 부처와 중생의 차이는 본래면목, 본래부처를 잘 알고 사는가 모르고 사는가 일 뿐 그 밖의 다른 것이 있지 않습니다. 

조금 더 구체적으로 이야기 해 보겠습니다. 우리는 저 그림 중에서 어떤 것을 나라고 합니까? 제일 밑에 있는 것만을 나라고 생각합니다. 나라고 하는 것이 독립되어 따로 있다고 알고 믿고 있습니다. 털끝만큼도 의심이 없죠.

실제가 아닌 것을 실제라고 알고 믿는 것을 반야심경에서는 전도몽상에 빠져있다고 설명합니다. 또는 망상에 사로잡혀 있다고 이야기 합니다. 실제와는 다르게 알고 믿는 것을 전도된 견해라고 합니다. 실상은 분리되어 있지 않은데 실상과는 반대로 분리 되어 있다고 알고 믿는 거죠. 그런 것을 반야심경에서는 전도몽상이라고 했습니다.

 그렇다면 부처님은 어떻게 알고 있을 까요? 부처님은 저 그림 전체가 자신의 진면목임을 아는 겁니다. 이 점이 우리하고 다릅니다. 저 그림에서 사람만 떼어 내어 그것을 나라고 생각하며 인생을 살 때하고, 전체를 나라고 생각하며 인생을 살 때하고 같겠습니까, 다르겠습니까? 당연히 다르죠. 하늘과 땅만큼 다릅니다.

 부처와 중생의 차이는 바로 이 지점에서 나오게 됩니다. 사람만 떼어내어 나라고 알고 믿게 되면 너와 나는 저절로 편이 갈리게 됩니다. 너와 나, 이쪽과 저쪽, 남자와 여자, 기독교인과 불교인, 깨달은 사람과 못 깨달은 사람, 부자와 가난한 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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