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귀의와반야심경 1강(3) - 삼보의 내용과 정신의 생활화가 불교수행(3) > 법회와 설법

본문 바로가기


법공양

보현법회 | 삼귀의와반야심경 1강(3) - 삼보의 내용과 정신의 생활화가 불교수행(3)

페이지 정보

작성자 실상사 작성일16-05-13 02:57 조회2,645회 댓글0건

본문

20163월 실상사 보현법회 회주 도법스님 법문

삼보의 내용과 정신이 실제 생활이 되도록 하는 것이 불교수행

-- 이전 글에서 이어짐

주의 깊게 관찰하고 생각하면 누구나 단순 명료하게 이해하고 수긍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 만들어진 것이 저 그림입니다. 역사적으로 보면 본래 부처, 나의 진면목, 인생의 참 자아를 가장먼저 그림으로 드러낸 것이 선사들의 일원상입니다. 보통 일원상은 한 마음을 근본진리로 표현했다고 설명 합니다  

지금은 일원상을 어디에서 쓰죠? 원불교에서 쓰고 있습니다.

일원상에서 조금 더 구체화 된 것이 현재 조계종단을 나타내는 삼보륜입니다. 원상 안에 점 세 개가 들어 있습니다. 점 세 개가 무엇이겠습니까? 승 삼보입니다  

삼보가 뭐냐? 인생의 진면목이 원상으로 표현되는데 그 내용을 잘 알고 살아보니 그 삶이 괜찮더라, 하고 모범을 보여 준 사람이 부처인데 바로 불보입니다. 그 다음에 그 내용을 알고 살면 괜찮다는 내용을 사람들에게 말로 설명한 것이 가르침인데 바로 법보입니다. 그리고 나도 부처님처럼 살 거야. 부처님 가르침대로 살 거야. 나의 진면목, 인생의 진면목, 나의 참자아가 저 그림처럼 생겼어. 그렇게 알고 그 정신, 즉 동체대비심으로 인생을 살 거야, 그렇게 발심하고 원을 세워 출가한 스님들의 집단이 승보입니다. 세월따라 대승불교로 오게 되면 재가자 중에서도 그렇게 발심하고 그렇게 원을 세워 살겠다고 하는 사람을 보살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재가보살을 포함시키는 사부대중 공동체 개념으로 확대됩니다. 좀 이해가 되시나요?

평소 경험해보면 어떻습니까. 일원상이 잘 이해되는가요? 솔직히 어렵지요. 설명을 들어도 들을 때는 약간 그런 것 같지만 다시 생각해 보면 잘 모르겠고 잊어버리고 그러죠. 저도 그렇습니다. 좀 더 구체화 된 삼보륜으로 이야기하면 조금 낫기는 하지만 역시 비슷합니다  

그래서 일원상만 갖고도 어렵고 삼보륜을 갖고도 쉽지 않고 그래서 보통사람이면 누구나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 만든 것이 이 그림입니다. 그래도 여전히 들을 때는 동의가 되는데 나중에는 잊어버리죠.(웃음) 그렇더라도 다시 보면 금방 이해하는데 도움이 되도록 하려고 만든 것입니다. 어떻습니까. 그래도 이 그림이 훨씬 더 구체적이고 사실적이어서 이해하기가 좋지요?  

정리하면, 저 그림이 인생의 진면목이야, 나의 참 자아야, 나의 본래면목이야, 나의 본래 부처야, 이렇게 알고 살아간 사람, 그렇게 알고 살아서 괜찮게 된 사람이 부처입니다.  

만약 그렇다면 지금 여기서 내가 진면목을 알고 살아서 그 삶이 괜찮아졌다면 나를 뭐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부처요) 그렇죠. ‘부처라고 할 수 있죠  

이렇게 보면 부처는 어떤 사람인가요? 부처는 인생의 진면목을 잘 알고 살아가는 내 친구, 내 형, 내 동생, 내 오빠, 내 누이, 내 아버지, 내 엄마, 내 아들, 내 딸이기도 합니다. 할머니, 할아버지이기도 하고 손자이기도 합니다.  

살펴 본바와 같이 부처님이 내 친구면 좋겠습니까, 안 좋겠습니까? 만약 친구라면 우리가 부처님을 만났을 때 어떻게 대하면 좋을까요? ‘어이, 반갑네하고 악수 하면 되겠죠. ‘잘 지내는가?’ 하고 인사하면 됩니다  

저는 우리의 스승인 부처가 이래야 된다고 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우리가 말도 걸어볼 수 없는 부처, 손도 잡아볼 수 없는 부처, 감히 같이 앉아서 술 한 잔도 할 수 없는 부처, 그런 존재가 부처라면 어떻겠습니까  

그렇다면 사람이라고 할 수가 없잖아요. 사람이 아닌 존재가 부처라면 우리에게 필요할까요? 난 필요 없다고 봅니다. 사람도 아닌 부처를 좋아해서 뭐하겠어요  

여하튼 아들이든 딸이든 남자든 여자든 오빠든 형이든 동생이든 너이든 나이든 누가 되었든 간에 인생의 진면목은 저 그림처럼 생겼어. 털끝만큼의 의심도 없이 확실하게 알고 저 그림 속에 깃든 정신, 즉 내가 소중하듯이 그 어떤 존재도 다 소중하니까 소중하게 여기는 자비심으로 살면 저절로 그 인생은 괜찮아집니다. 그 사람을 우리는 부처라고 합니다  

이렇게 볼 때 세상에 부처가 몇 명이에요? 사람 숫자만큼 이죠. 아들 부처도 있고, 손자 부처도 있고 아저씨 부처도 있고 조카 부처도 있고 남자 부처도 있고, 여자 부처도 있는 겁니다  

붓다의 가르침에 따라 본래 부처의 정신으로 가면 온갖 차별의 벽이 다 허물어지게 됩니다. 불평등의 벽을 훌쩍 넘어서게 됩니다. 그 정신이 제대로 구현되면 우리가 겪는 문제들이 다 해결되는 겁니다. 정리하면 부처는 사람이다, 우리의 이웃이다, 친구다, 이런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정말 그럴까? 정말 그런 경우도 있고 그렇지 아니한 경우도 있죠. 누구나 다 우리의 이웃이고 친구이고 형제일 수 있습니다. 하지만 부처로서의 친구, 부처로서의 이웃, 부처로서의 형제이려면 삼보를 잘 알고 삼보의 정신대로 삶을 살아야 됩니다. 삼보를 잘 모르고 살면 중생일 수밖에 없습니다  

제대로 알고 실천하느냐, 그렇지 않느냐의 문제입니다. 제대로 알고 안 내용대로 실천하기만 하면 누구든지 다 부처입니다. 붓다가 모범을 보여주고 길을 가르쳐주고 그렇게 살겠다고 결심한 사람들에 대해 설명한 것이 삼보입니다.  

그렇게 알고 제대로 살아간 사람을 불보라고 하고, 그 내용을 가르쳐 준 것을 법보라고 하고, 그런 내용대로 살겠다고 작심하고 인생을 건 사람들의 집단을 승보라고 합니다. 어쩌면 삼보가 불교의 전부라고 해도 괜찮습니다  

지금까지 설명 드린 삼보의 내용과 정신을 잘 알고 끊임없이 새기고 또 새기고, 음미하고 또 음미하고, 되새김질하고 또 되새김질하여 실제 생활이 되도록 하는 것이 불교 수행입니다. 일상적으로 내 사고와 언어와 생활이 삼보의 정신대로 이루어지면 그 삶은 괜찮은 삶이 되어 집니다. 그렇게 살아서 삶이 괜찮아진 사람을 부처라고 합니다  

다음 달부터는 우리가 반야심경을 공부할 겁니다. 지금까지 말씀드린 내용을 반야심경에서는 한 마디로 마하반야바라밀이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대부분 반야심경을 이야기할 때 주로 반야에 대해서만 이야기 합니다. ‘반야는 잘 안다는 이야기이고요, ‘바라밀은 잘 실천한다는 이야기입니다. 실천이 없는 앎은 진짜 앎이 아닙니다. 앎이 없는 실천도 진짜 실천이 될 수 없습니다.  

마치 사람 몸에 비유하자면 제대로 아는 것은 에 해당하고 아는 대로 실천하는 것은 에 해당이 됩니다. 눈이 없이 봉사가 길을 가면 어떤 현상이 벌어지겠습니까? 곳곳에서 길을 잃고 부딪힙니다. 너도 다치고 나도 다치고 그럽니다. 여기 저기 부딪혀서 너도 다치고 나도 다치면 싸움판이 벌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눈이 없는 발은 발이라고 할 수 없는 거죠  

또 반대로 저 앞에 맛있는 떡이 있는데 눈으로 그 떡을 봤습니다. 하지만 눈으로 봤다고 하더라도 발이 없으면 먹을 수가 없습니다. 그러니까 발이 없는 눈은 있으나 마나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진짜 눈이 아닙니다. 그러기 때문에 늘 눈과 발은 함께 있어야 합니다. 발이 없는 눈은 진짜 눈이라 할 수 없고 눈이 없는 발도 진짜 발이라 할 수 없습니다  

눈과 발을 한 마디로 표현한 것이 반야심경제목입니다. ‘반야바라밀.’ ‘반야는 눈에 해당하고 바라밀은 발에 해당합니다  

대부분 우리는 발이 없는 눈으로 인생을 살던가 아니면 눈이 없는 발로 인생을 삽니다. 충돌하고 헤맬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 사람이 중생인거죠. 아는 것 같은데 실천은 없어. 실천하는 것 같은데 뭘 잘 모르고 있어. 이런 식이죠  

눈과 발이 갖추어진 사람을 우리는 부처라고 합니다. 아는 대로 실천한다는 겁니다. 아는 것과 실천이 일치되는 사람인거죠. 여래십호(如來十號), 여래를 열 가지 이름으로 부르는데 그 중의 하나 명행족(明行足)’이 있습니다. 밝을 명()자는 안다는 의미이고, 행할 행()자는 실천한다는 이야기입니다. 아는 것과 실천하는 것이 구족하다, 갖추어졌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불행하게도 한국불교에서 반야심경을 해석하고 설명하는 것을 보면 실천에 대한 이야기들이 잘 안 다루어지는 경우가 태반입니다. 계속 지혜, 깨달음만 강조합니다. 그러니까 맨날 반야심경을 외우긴 외우는데 실제 실천의 문제로 연결이 안 되는 거예요. 비유하자면 눈만 있고 발은 없어도 된다는 식이지요.  

반야바라밀.’ 저 그림이 인생의 진면목이고 저 정신대로 살면 삶이 괜찮아 진다는 사실을 잘 아는 것이 지혜, 깨달음, 부처의 안목이라고 이야기 할 수 있습니다. 그렇게 알고 사는 사람이 부처고, 그 내용을 가르쳐주는 것이 부처의 가르침이고, 그 내용대로 살겠다고 마음먹고 인생을 건 사람을 우리는 스님, 승가라고 이야기 합니다. 재가자 중에서도 그 정신에 따라 살겠다고 발심하고 원을 세운 사람을 보살이라고 합니다  

우리가 삼보에 귀의한다는 것은 삼보의 정신으로 삶을 살겠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우리가 일상 속에서 늘 삼귀의를 하는데 삼보가 갖는 의미를 끊임없이 탐구하고 되새기고 삼보에 담겨있는 정신이 내 사고가 되고 언어가 되고 행동과 삶이 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참된 수행입니다. 그렇게 하면 일상적인 삶과 수행, 깨달음과 삶이 일치 될 수 있습니다. 그렇게 해야만 실제 삶에 유익한 불교 수행이 됩니다.  

수행을 떠난 삶, 또는 삶을 떠난 수행을 하면 삶도 제대로 살 수 없고 수행도제대로 안됩니다. 늘 삶과 수행이 통일 될 수

  • 페이스북으로 보내기
  • 트위터로 보내기
  • 구글플러스로 보내기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

게시물 검색

Copyrights ⓒ www.silsangsa.or.kr. All rights reserved  주소 55804 전북 남원시 산내면 입석길 94-129
(대표메일) silsang828@hanmail.net (전화) 063-636-3031 (팩스) 063-636-377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