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귀의&반야심경 8강 : 불구부정, 더러움도 깨끗함도 없네 > 법회와 설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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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현법회 | 삼귀의&반야심경 8강 : 불구부정, 더러움도 깨끗함도 없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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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실상사 작성일17-01-23 19:20 조회488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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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월 보현법회 (2017.1.15)
[삼귀의와 반야심경] 강의 (8강)

*아래는 발췌문입니다. 첨부파일에 전문이 있습니다. 


불구부정(不垢不淨), 더러움도 깨끗함도 없네


도법스님 (실상사 회주)


반야심경으로 본 한국사회

(…) 정치라는 말의 본질을 회복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우리 스스로가 정치를 이야기할 때, 우리 사회의 공동체성을 회복하는 일, 진정으로 민생을 위한 일을 중심에 두고 사고하고 판단해야 합니다. 그런데 올바른 방향과 중심이 없이 현실정치판에 관련되다 보면, 자기도 모르게 즉각 기존 정치판으로 끌려들어가고 말지요. (…) 
권력을 중심에 놓고 누가 권력을 잡느냐의 문제로 접근하는 정치로는 희망이 없다고 봅니다.

알고 보면 이런 현실을 진리의 정신으로 잘 파악하고 그 정신으로 생활정치를 잘 실천하신 분이 붓다입니다. 예를 들어 부은 살아계실 때도 그랬지만 돌아가실 때도 후계자를 정하지 않았습니다. 만약 부처님께서 권력중심의 교단운영이 법에 맞다고 생각했다면, 그는 교단운영의 책임자로 당연히 후계자를 정하셨겠죠. 

그런데 붓다는 그렇게 하지 않으셨습니다. 오히려 열반을 앞두고 제자들이 ‘스승의 은밀한 교지가 있을 것’이라는 생각을 갖고 있음을 아시고, “나는 안과 밖이 다르지 않은 가르침을 설했다. 그 어떤 비밀도 없다.”고 말씀하시죠. 그리고 ‘비구의 집단인 교단을 내가 지도하고 있다.’든가 ‘비구의 모임은 나의 지시를 따르고 있다.’고 생각한 일도 결코 없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법을 등불로 삼고 자신을 등불로 삼으라. 법을 의지처로 삼고 자신을 의지처로 삼으라”고 하셨습니다. 

***
대의명분의 실종, 소통의 부재는 문제를 풀어내는 쪽으로 나아가기는커녕 오히려 문제를 더 왜곡시키고 더 혼란스럽게 합니다. 온갖 좋은 말로 환상을 심어주는 행사나 축제로 국민을 현혹시킬 뿐으로 그 결과는 문제의 확대재생산입니다. 요즘 정국을 봐도 그렇습니다.

문제를 덮어서 밀쳐놓으면 잊히고 없어질 것이라고 생각하는데, 절대 그렇지 않습니다. 적절한 비유일지는 모르겠는데 예를 들어 호수에 쓰레기를 버렸다고 합시다. 세월이 가면 물속으로 가라앉아서 눈에는 안 보이겠죠. 시간과 함께 기억에서도 사라지겠죠. 그렇다고 그 쓰레기 문제가 사라졌을까요? 시간이 흐르면 썩어 문드러져서 다 괜찮아지는 것일까요?

우리 눈에 남아있지 않고 우리 기억에 남아있지 않더라도 어떤 형태로든 더 심각하게 우리 삶을 오염시키고 병들게 하고 삶을 위태롭게 만들고 고통스럽고 불행하게 만드는 것으로 작동하게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가능하면 문제를 드러내어 풀어내는 게 중요합니다. 덮어놓는다고 해서, 잊혀진다고 해서, 내 눈앞에 없다고 해서, 실제로 없어진 것은 아니고 어떤 형태로든 우리 삶에 영향을 끼치게 된다는 것을 놓치지 않고 챙겼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지금까지 이야기한 내용이 현실을 보는 반야심경의 사고방식입니다. 그것은 ‘지금 여기에서 직접적으로 주체적으로 삶의 문제를 바라보고 다루는 것이 문제를 바람직하게 다루는 것이기도 하고, 올바른 삶이기도 하다’라고 할 수 있습니다. 


참자유로 나아가는 참지혜의 길

지금 여기, 자유자재로 관찰사유하는 참 사람 있네. 
그는 참 지혜로 실천할 때 
인연의 어울림으로 이루어진 다섯 무더기 모두 있지만 
실제 비어있음을 잘 이해하여 대자유의 삶으로 나아갔네. 

참 지혜의 길을 가려고 하는 사람, 사리자여, 
그대 몸 그대로 실제 비어있음과 다르지 않고 
비어 있음 그대로 그대 몸과 다르지 않으며 
그대 몸 그대로 비어있음이며 비어있음 그대로 그대 몸이니 
느낌도 생각도 의지도 분별도 그러하네. 

사리자여, 모든 사람의 비어있는 참모습엔 
(그대가 생각하는) 
태어남도 소멸함도 더러움도 깨끗함도 늘어남도 줄어듦도 본래 없네. 
마찬가지로 몸도, 느낌도, 생각도, 의지도, 분별도, 
눈도, 귀도, 코도, 혀도, 몸도, 뜻도 없네. 
물질도, 소리도, 맛도, 향기도, 촉감도, 기억도, 
눈의 경계로부터 귀와 코와 혀와 촉감과 기억의 경계도 없네. 
알지 못함도, 알지 못함이 사라짐도, 
늙고 죽음도, 늙고 죽음이 사라짐도, 
괴로움도, 괴로움의 원인도, 소멸도, 소멸의 길도, 
지혜도, 얻음도 없네. 

얻을 것이 없으므로 보살행자는 
참 지혜로 실천하는 이 길에 의지하여 마음에 걸림이 없고 
걸림이 없음으로 두려움이 없어서 
뒤바뀐 헛된 생각을 멀리 떠나 항상 해탈 열반의 삶을 살며 
모든 붓다들도 이 길에 의지하여 깨달음의 삶을 완성하네. 
그런 까닭에 알 수 있네. 
이 길은 가장 신비하고 밝고 높은 진언이니 
온갖 괴로움을 없애고 진실하여 허망하지 않네. 

그러므로 이제 그 진언을 말하여라. 
아제아제 바라아제 바라승아제 모지사바하. 


본래부처, 그리고 본래부처로 온전히 사는 실천

(…) 먼저 '본래부처에 대한 이해와 확신', 그리고 본래부처답게 지금 여기에 온전히 존재하는 실천으로 두 가지, 즉 '노는 입에 염불하는 집중수행''부지깽이 노릇하는 자비수행'을 이야기했습니다. 여기서 ‘노는 입에 염불하는 집중수행’은 홀로 있을 때 주로 그렇게 하라는 것이었고, ‘부지깽이 노릇하는 자비수행’은 사람과 관계할 때 다른 나무들이 잘 타도록 하는 부지깽이 역할, 자비롭게 살아야 함을 강조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반야심경에서 이야기하는 ‘본래부처’의 내용은 무엇일까요? 색즉시공(色卽是空), 공(空)입니다. 조견오온개공 도일체고액(照見五蘊皆空 度一切苦厄), 즉 오온이 다 공이다, 오온이 본래 공임을 제대로 알면 삶이 자유로워진다, 고난으로부터도, 불안으로부터도, 어리석은 탐욕과 집착으로부터, 어리석음으로부터 자유로워진다고 강조하고 있습니다. 표현은 달라도 내용으로는 본래부처론하고도 같습니다. 본래부처는 실천주체인 인격적 표현인 것이고, 공(空)은 철학적이고 논리적인 표현일 뿐입니다.

그러면 ‘노는 입에 염불하는 집중수행’은 무엇일까요? 반야심경에서는 무엇을 하라고 합니까? ‘아제아제 바라아제 바라승아제 모지사바하’라는 진언을 지극한 마음으로 외우라고 합니다. 왜 그럴까요?
우리는 몸이건 마음이건 주체적으로 정신 바짝 차려 잘 쓰지 않으면 거의 대부분 습관대로 가게 되어 있습니다. 삶의 주인으로 사는 것이 아니고 습관의 노예로 살게 되는 거죠. 사실 우리들이 갖고 있는 습관이라고 하는 것은 좋은 것이 별로 없습니다. 그렇죠?(웃음) 따지고 보면 나를 주체적인 의도로 해치고 너를 해치는 것들이 대부분입니다. 그리고 그 습관은 즉각즉각 나타납니다. 시기질투를 일으키는 것이 아니고 거의 본능적으로 자신도 어찌할 수 없이 일어납니다. 욕심도, 분노도 다 마찬가지입니다. 휘발유에 확 불이 붓듯이 통제불능으로 나타납니다. 습관이란 그런 것이고 그것을 불교에서는 ‘업력’이라고 합니다. (…)

그 다음엔 관계의 측면에서 ‘부지깽이 노릇하는 자비수행’, 즉 자비롭게 마음 쓰고 사는 수행입니다. 반야심경에는 자비수행에 대한 표현이 직접적으로는 없습니다. 그렇지만 반야심경에서 말하는 공(空)의 정신을 잘 이해하고 그 정신에 따라 마음 쓰고 살면 그 자체가 자비수행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


불구부정(不垢不淨) ; 더러움도 깨끗함도 없네

사실 ‘비어있는 참모습’에 대해서만 제대로 알면 반야심경 공부는 다 한 것입니다. 붓다께서 깨달으신 것도 ‘비어있는 참모습’이 전부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여기에서 언제나 놓쳐서는 안 될 것이 있습니다. 바로 ‘그대가 생각하는’이라는 대목입니다. 이해를 돕기 위해 삽입한 문구입니다. 우리는 늘 거의 본능적으로 내 생각이 옳다는 생각에 사로잡혀 있습니다. 자기도 모르게 습관적으로 내가 옳다는 생각을 전제로 삶의 문제를 다루기 때문에 다음 문제가 발행하게 되는 것입니다. 늘 그렇습니다.

그래서 붓다께서는 “네 생각에 대해 늘 의심하라”, “네가 알고 믿고 있는 것은 네 생각일 뿐 실제는 공(空), 그렇지 않다”고 하십니다. 반야심경은 처음부터 끝까지 그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대표적으로 예를 든 것이 불생불멸, 불구부정, 부증불감(不生不滅 不垢不淨 不增不減)입니다. 

예쁨과 미움, 깨끗함과 더러움이 따라따로 분리되어 있지 않습니다. 마치 동전의 양면처럼, 마치 한 몸의 왼손과 오른손처럼 분리될 수 없습니다. 이것 없이 저것이 존재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니 아무리 깨끗하게 꾸민다고 해도 실제 인간의 몸은, 부정적으로 이야기하면 피고름부대이고 똥통입니다. 얼굴과 항문을 분리시킬 수 있습니까? 없습니다. 분리시킬 수 없기 때문에 깨끗한 것이 따로 있고 더러운 것이 따로 있다고 하는 것은 우리들의 무지와 착각일 뿐이라는 거죠. 

사실을 놓고 보면, ‘더러움 없이 깨끗함이 존재할 수 없다, 그러므로 깨끗함은 공이다. 깨끗함이 없이 더러움도 없다. 그러므로 더러움도 공이다.’ - 이것이 ‘불구부정’입니다. 이 사실을 있는 그대로 파악하고 보면 우리는 거의 다 자신이 만든 관념의 지배를 받고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깨끗한 것이라는 관념, 더러운 것이라는 관념에 사로잡혀 그 관념에 지배를 받고 있는 것입니다.

본인이 생각하는 ‘깨끗한 것이 좋은 것’이라는 관념이 절대화되어 그에 사로잡히면 어떤 현상이 나타날까요? 현실적으로 삶이 불가능해집니다. 현대문명이 바로 그런 문제를 안고 있는 겁니다. 그것을 잘 보여주는 곳이 화장실이죠. (…)

***
이런 점들을 놓고 보면, 우리가 실제를 잘 관찰하고 실제 생명의 진리에 맞게 살아가지 않으면 좋은 의도로 열심히 하고 는 것 자체가, 사실은 생명을 병들게 하고 죽게 하는 악마의 인간으로 전락시키고 있는 것이 현대문명의 모순이죠. 

반야심경의 정신은, 우리가 보고 직면한 실제를 잘 관찰하고 직면한 생명의 질서를 잘 이해하고 그 생명의 질서에 맞게 살아가야 삶이 괜찮아진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참자유로 나아가는 참지혜의 길’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또 다른 관점에서 보면 평소 작은 불편을 기꺼이 감내하고 사는 삶이 지혜로운 삶이라고 할 수도 있겠습니다. 우리가 평소에 작은 불편을 감내하지 않으면 치명적으로 돌이킬 수 없는 상황이 오게 되어 있습니다. 작은 불편을 감내해야만 큰 문제가 발생하지 않습니다. 생명의 세계는 그렇습니다. 

***
반야심경은 직면한 실상, 있는 사실을 있는 그대로 제대로 살피고 이해해서 그 안에 깃든 정신에 맞도록 삶을 살아가야 그 삶이 바람직하고 희망적으로 된다는 것을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끝으로 오늘 공부한 불구부정, 즉 더러움도 깨끗함도 없다는 말씀의 핵심을 정리해봅시다. 

‘모든 것은 분리되지 않기 때문에 어느 한쪽만을 좋다, 나쁘다로 왜곡시켜 단정하고 과장시켜 그 관념에 따라 삶을 살면 안 된다. 만약 그렇게 하면 결국 돌이킬 수 없는 함정에 내몰리게 되고, 삶을 불행하게 하는 결과를 낳는다. 그 어리석음에서 깨어나자. 따라서 일상 속에서 작은 불편함이 갖고 있는 의미를 제대로 이해하고 파악하여 기꺼이 감내하며 사는 것이 삶의 참지혜이다. 그랬을 때 큰 불편을 초래하지 않는다.’ 

함께 공부한 반야심경의 정신, 오늘 배운 불구부정(不垢不淨)에 담긴 의미를 내 삶에 스며들도록 하는 것이 지혜로운 삶입니다! 그게 진짜 수행입니다! 그게 진짜 붓다의 가르침을 실천하는 길입니다! 우리 모두 그 길을 가는 도반이 되록 마음내고 정진했으면 좋겠습니다. 

※ 실상사 보현법회는 매달 세 번째 일요일 오전10시에 있습니다.
   현장에서 들으면 더욱 생생한 깨침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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