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귀의&반야심경 10강 : 부증불감, 늘어남도 줄어듬도 본래 없네 > 법회와 설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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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현법회 | 삼귀의&반야심경 10강 : 부증불감, 늘어남도 줄어듬도 본래 없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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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실상사 작성일17-05-07 13:53 조회431회 댓글2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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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3.19 보현법회

<삼귀의와 반야심경> 강의 (10)

부증불감((不增不減), 늘어남도 줄어듬도 본래 없네

 

도법스님(실상사 회주)

 

붓다는 오늘도 우리에게 이런 질문을 하고 계십니다.
“너는 바보니?”
어떻게 생각하세요? 우리가 바보인가요? 그리고 부처님은 또 이렇게 답도 가르쳐주십니다.
“너는 바보가 아니다. 바보가 아니기 때문에 밥 주면 밥 먹을 줄도 알고, 졸리면 잘 줄도 알고, 필요하면 걸어갈 줄도 안다. 이렇게 주체적으로 삶을 창조하는 거룩하고 위대한 능력을 발휘하고 있는데, 어떻게 바보라고 할 수 있겠니.”

그러면서 붓다는 “나의 가르침, 나의 진리는 말을 못 알아듣는 사람은 빼고 말을 알아들을 수 있는 사람은 누구나 바로 이해할 수 있고, 바로 이룰 수 있으며 정말 그렇게 되는지 바로 검증, 증명할 수 있다”고 합니다. 같이 허심탄회하게 대화를 할 경우 바로 이해되고 실현되고 증명되는 것이 나의 가르침, 나의 진리라는 이야기죠.

어떠세요? 붓다의 말씀이 거짓말이 아니라면, 우리가 지금 공부하고 있는 붓다의 반야심경이 바로 이해가 되기도 하고 바로 효과가 나타나기도 해야 하잖아요. 실제 그렇게 되는가요? (모두 웃음) 이해가 잘 되세요? 이해가 잘 안 되죠? 효과는 어떻습니까? 효과도 별로 없죠? (모두 웃음) 그렇다면 붓다가 거짓말쟁이이거나 법문하는 사람이 엉터리이거나 아니면 여러분이 붓다를 거짓말쟁이로 만들거나 법문하는 사람을 엉터리로 만들고 있거나. 어떻든 셋 중에 하나이겠네요. 그렇지 않습니까? 그런데 만일 그렇지 않다면 왜 그럴까요?

애써 반야심경 공부를 하는데 왜 이해가 잘 안 되고 효과도 없을까요? 붓다는 그 이유를 있는 그대로의 길인 중도적으로, 진리의 길인 연기적으로 하지 않기 때문이라고 말씀하십니다. 반야심경식으로는 공(空)의 길입니다.

붓다가 깨달은 진리의 핵심은 두 가지로 표현됩니다. 하나는 지혜가 아닌 지식, 있는 그대로가 아닌 기억, 생각의 길인 관념, 즉 양극단의 길을 버림으로써 발견한 지식이 아닌 지혜, 관념이 아닌 있는 그대로의 길인 중도의 길입니다. 다른 하나는 중도, 있는 그대로 관찰사유한 끝에 발견한 분리 ‧ 독립이 아닌 상호의존, 고정불변이 아닌 상호변화의 길인 연기법, 즉 진리의 길입니다.

따라서 중도, 즉 있는 그대로 관찰사유하면 틀림없이 연기의 길을 가게 되고 연기의 길을 가면 그 자체가 중도의 길과 만납니다. 그러므로 중도의 눈, 연기의 눈으로 직면한 삶의 참모습을 관찰하면 사람이 해도 괜찮은 일과 해서는 안 되는 일이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해 넘어서는 안 되는, 반드시 지켜야 하는 금도(禁道)가 있다는 이야기입니다. 해도 괜찮은 일은 노력한 만큼 좋은 방향으로 발전해가게 되고 해서는 안 되는 일은 하면 할수록 심각한 재앙을 낳게 됩니다.

왜 그럴까요? 있는 그대로의 길, 연기의 길, 즉 진리가 그러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있는 그대로의 길, 연기의 길을 잘 알고 가는 것이 바로 깨달음의 길, 지혜의 길, 즉 불교수행의 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가도 되는 길, 가면 안 되는 길

이쯤에서 가도 되는 길과 가면 안 되는 길이 구체적으로 어떤 경우인지 두 가지 예를 갖고 살펴보겠습니다.

먼저 사람들이 더럽다고 싫어하는 똥 문제를 예로 들어보겠습니다.

우리는 평소 똥은 더러운 것, 나쁜 것, 못쓰는 것, 필요 없는 것, 없어야 하는 것으로 알고 믿습니다. 털끝만큼도 의심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정말 그럴까요?

그렇다면 본인이 알고 믿는 것처럼 그 놈의 몹쓸 똥을 아예 몸에서 만들지 못하도록 항문으로 배출하지 못하도록 하면 어떨까요? 본인이 싫어하고 없애버리고 싶어하는 것이 만들어지지도 않고 배출되지도 않으니 속 시원할까요? 통쾌하고 좋을까요? 당연히 단견, 관념으로만 보면 괜찮습니다. 좋고 말고요.

그런데 중도, 있는 그대로 보면 어떨까요? 음식이 똥이 될 수 없다, 똥이 항문으로 배출될 수 없다. 그렇게 될 경우 음식을 먹을 수 없습니다. 똥을 눌 수 없습니다. 과연 편안할까요? 견딜 수 있을까요? 살 수 있을까요? 관념이 아니고 사실로 보면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고통입니다. 끝내는 비참한 죽음입니다. 왜 그렇게 될까요? 중도의 길, 연기의 길에 어긋나는 단견의 길, 관념의 길을 가기 때문입니다.

반면, 있는 그대로를 기꺼이 인정하고 존중하고 받아들이고 나아가 적극적으로 적절하게 잘 관리조절하고 활용하면 어떨까요? 먹은 음식을 잘 소화시켜 좋은 똥이 되도록 한다. 항문을 통해 잘 나가도록 한다. 똥을 잘 발효시켜 배추, 무, 감자, 고구마, 수박, 딸기 등의 양식이 되게 한다.

그렇게 하면 어떻게 될까요? 음식이 맛있다. 뱃속이 편안하다. 몸이 건강하다. 쾌번, 기분이 좋다. 좋은 먹거리를 먹을 있어 더욱 좋다. 삶 자체가 활기차다. 더 가치 있고 좋은 삶을 창조할 수 있으니 나에게도, 상대에게도, 우리 사회 모두에게도 좋다.

왜 그렇게 될까요?
중도, 있는 그대로의 길, 연기, 진리의 길을 기꺼이 잘 가기 때문입니다. 인생을, 세상을 잘 알고 가기 때문에 주어진 삶을 매우 창조적으로 가꾸어가게 되고, 그 결과 자신에게도 상대에게도 유익한 삶이 되는 것입니다. 그 삶을 우리는 해탈열반의 삶이라고 합니다.

다른 하나는 불평등하다고 하는 남녀문제를 예로 들어보겠습니다.

우리는 오래 전부터 지금까지 남자는 우월하고 여자는 열등하다고 알고 믿어왔습니다. ‘남녀는 평등하지 않다. 차별하는 것이 문제될 것이 없다’고 여겨왔습니다. 저절로 남자는 우월감을, 열자는 열등감을 갖게 되었습니다.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우월감에 젖은 남자는 여자를 함부로 취급해왔고 열등감에 사로잡힌 여자는 여자로 태어난 것을 비관하고 부정하며 살아왔습니다.

그 결과 남자도, 여자도 비인간, 비인격적으로 전락했고 남녀 모두 고통스럽고 불행하게 되었습니다. 왜 그렇게 되었을까요? 중도의 길, 연기의 길에 어긋나는 단견의 길, 관념의 길을 가기 때문입니다. 가서는 안 되는 넘어서는 안 되는 금도를 깼기 때문인 것입니다.

반면, 있는 그대로를 잘 봅시다.
여자 없는 남자, 아내 없는 남편, 엄마 없는 자식은 있을 수 없습니다. 남자에게 여자는, 남편에게 아내는 자식에게 엄마는 절대적인 존재입니다. 인류역사상 인간을 가장 인간답게 한 위대한 인물이 붓다, 예수, 공자, 소크라테스 등입니다. 그들을 누가 낳았습니까. 여자, 아내, 엄마입니다. 남자 그 누구도 그들을 낳을 수 없습니다. 천지개벽하는 일이 벌어져도 남자가 아이낳는 것을 불가능합니다. 생명을 낳고 길러내는 일보다 더 소중하고 거룩한 일, 더한 신비, 기적, 불가사의는 없습니다.

그런데 그 여자가 ‘열등하다’, ‘비천하다’, ‘죄업이 많다’하며 무시하고 차별하는 것이 상식적으로 말이 됩니까. 말이 안 되죠. 말이 안 되는 데도 불구하고 그렇게 살게 되는 이유가 어디에 있는 것일까요? 중도, 연기에 어긋나는, 가서는 안 되는 어리석은 길, 관념의 길을 가기 때문입니다.

머뭇거릴 시간이 없습니다. 서둘러야 합니다. 깨닫는 즉시 그릇된 길, 잘못된 길, 관념의 길을 버리고 떠나야 합니다. 반드시 가야 할 중도의 길, 연기의 길을 따라 당당하게 본래붓다인 여자 자신의 길을 가야 합니다. 경전에서는 당당하게 기꺼이 인간적 모성애를 넘어 본래붓다인 여자답게 인류의 모성애로 살아가는 대표적 인물을 관세음보살이라고 합니다. 그는 조건 없는 인류의 모성애로 기꺼이 누이로, 아내로, 어머니로, 할머니로 살아갑니다. 그 삶이 당당합니다. 사람들도 존중하고 고마워합니다.  

여자 스스로에게도 좋지만 남자들에게도 좋습니다. 모두에게 유익합니다. 어째서 그렇게 될까요? 중도의 길, 연기의 길, 즉 인생을, 세상을 제대로 알고 주어진 삶을 기꺼이 창조적으로 가꾸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입니다. 그 삶을 경전에서는 해탈.열반의 삶이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중도.연기의 눈으로 직시해야 삶을 긍정적으로 낙관적으로 창조적으로 사는 것이 가능한데, 가야 할 길인지, 가서는 안 되는 길인지를 정리하지 못하니까 쓸데없는 우월감, 열등감, 좋다, 나쁘다고 하는 번뇌를 일으킵니다. 반야심경은 그 어리석음을 전도몽상이라고 문제제기를 하고 있습니다.

우리 삶을 통해 본 전도몽상
– 일상의 신비함, 위대함, 거룩함을 알지 못하는 것

전도몽상이 무엇인가를 우리 삶을 통해 생각해봅시다. 볼 수 있고, 들을 수 있고, 대답할 수 있고, 밥이 오면 먹을 수 있고, 필요하면 걸어갈 수 있고… 사실을 따져보면 평범한 일상이 얼마나 신비하고 위대하고 거룩한 일입니까? 그런데 우리는 평범한 일상을 시시하게 생각합니다. 아니 아예 진지하게 확인해보지도 않습니다. 그리고 평범한 일상 말고 어딘가에 특별하게 신비하고 위대하고 거룩한 무엇이 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반야심경은 그런 사고방식을 전도몽상이라고 했습니다.
 
잘 생각해 보십시오. 보고, 듣고, 말하고, 먹고, 자고… 이보다 더 좋은 것, 더 중요한 것, 더 거룩한 것이 있을까요? 없어요. 관념으로는 있을 것 같지만 천하를 뒤져도 없습니다. ‘있을 것 같다’는 것은 우리의 생각, 망상일 뿐입니다. 사실은 없는데도 불구하고 본인의 생각으로 있다고 믿는 것이 바로 전도몽상입니다. 불교공부를 한다는 것, 수행을 한다는 것은 바로 지금 본인이 알고 믿는 것이 전도몽상임을 알고 버리는 것, 떠나는 것을 뜻합니다. 붓다께서는 전도몽상을 버리면 구경열반(究竟涅槃), 즉 해탈이고 열반이라고 말합니다. 일상언어로 말하면 잘못된 생각을 버리고 떠나면 평화와 팽복의 길이 열린다는 이야기입니다.

부처와 중생은 딱 한 끗 차이

있는 그대로를 주의를 기울여서 관찰해보면, 부처와 중생의 차이는 딱 한 끗 차이입니다. 두 끗도 아닙니다.
선가(禪家)에서 많이 하는 이야기 중에 ‘소를 타고 소를 찾는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소를 찾으러 하루 종일 돌아다녔는데, 알고 봤더니 자기가 소를 타고 있더라는 거죠. 이 이야기에는 잃어버린 곳이 어디이고, 찾아야 할 것이 무엇인지 확실하지요. 그런데 대부분의 사람들은 무엇을 어디서 잃어버렸는지도 제대로 알지 못한 채 잃어버린 것을 찾겠다고 안간힘을 다해 노력하지만 대부분 헛수고로 끝냅니다. 바로 중생살이가 그렇습니다.

무엇인가를 찾는 사람은 기본적으로 ‘잃어버린 것’과 ‘잃어버린 곳’을 정확하게 알아야 합니다.
 
먼저, 우리는 무엇을 잃어버렸을까요? (자신의 참모습이요).

그렇습니다. 하지만 좀더 구체적으로 알아야 합니다. 우리가 찾아야 할 자기 자신은 어떤 존재인가요? 나는 눈으로 볼 줄 알고 귀로 들을 줄 알고 입으로 말할 줄 알고 두 발로는 걸을 줄 알고 두 손으로는 만질 줄 알고 졸리면 잘 줄 알고 배고프면 먹을 줄 알고 행위하면 행위하는 대로 이루어지고… 정말 신비하고 불가사의하고 고귀한 존재입니다. 이 세상에 이보다 더 중요하고, 더 신비하고, 더 불가사의하고, 어 고귀한 것이 있습니까? (없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유아독존, 본래붓다인 지금 여기 자신을 놔두고 자꾸 다른 것을 찾으려고 하고 있으니 참으로 안타깝습니다.

다음은 잃어버린 곳을 정확하게 알아야 찾을 수 있습니다.  자신을 어디서 잃어버렸습니까?

서울에서 잃어버렸나요? 미국에서 잃어버렸나요? 아니면 저 히말라야? 달나라? 어디에서 잃어버렸어요? (지금 여기에서요.)
그렇습니다. 지금 여기에서 잃어버렸습니다. 바로 지금 여기 사람이, 자신이 본래붓다임을 잃어버린 것이죠. 그렇다면 찾아야 할 곳도 지금 여기겠네요? (네) 그런데 우리는 지금 여기 자신이 이 세상 최고의 존재인 본래붓다임을 망각하고 자꾸 다른 어느 곳에 특별히 더 좋은 것이 있다는 망상에 사로잡혀 동분서주하고 있는 셈입니다.  참으로 한심하고 답답한 노릇입니다.

예를 들어 내가 지금 여기에서 어떤 물건을 잃어버렸다고 칩시다. 그래서 물건을 찾으려고 하는데 지금 여기가 너무 어두워요. 그러니 찾기도 힘들고 고통스러워요. 그런데 들어보니 서울은 낮이나 밤이나 엄청 밝대요. 그 이야기를 듣고 밝은 서울로 갔어요. 잃어버린 그 물건을 찾을 수 있을까요? 절대 찾을 수 없습니다. 왜 그럴까요? 서울은 밝은 곳이긴 하지만 물건을 잃은 곳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실제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바보처럼 여기서 잃어놓고 자꾸 다른 데를 찾아다니고 있습니다. 죽도록 고생을 하지만 결과는 헛수고로 긑납니다. 그 삶을 되풀이 하는 것이 중생인데, 부처의 길을 가겠다고 하면서 끝내 중생놀음을 하고 있으니 참으로 답답합니다.

앞에서 부처와 중생은 딱 한 끗 차이라고 했는데, 바로 이 지점입니다. 이것을 알고 사는 사람이 부처이고, 모르고 사는 사람이 중생이라는 것입니다. 딱 한 끗 맞죠? (모두 웃음)

반야심경, 아니 팔만사천법문이 다 처음부터 끝가지 이 한 끗 차이를 이야기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것을 좀 잘 알아듣게 해 보려고 이렇게도 이야기하고 저렇게도 이야기하는 것이죠. 그 내용들은 시간적으로는 수천년, 공간적으로는 우리와는 다른 사회적 ‧ 문화적 조건과 상황에서 만들어진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여기 우리에게는 대단히 특별한 무엇이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습니다.
 
부처는 무엇인가요? 인간은 끊임없이 스스로 완전해지고 싶어 합니다. 완성된 삶을 산 사람을 부처라고 합니다. 달리 말하면, 정상적인 삶을 사는 사람을 부처라고 하고 비정상적인 삶을 사는 사람을 중생이라고 하는 거죠. 그러면 정상과 비정상의 차이는 무엇입니까. 딱 한 끗 차이입니다. 관념으로 보고 사는가, 사실대로 보고 사는가, 사람이 ‘미완성자 업보중생’이라는 믿음으로 사는가, ‘완성자 본래붓다’라는 믿음으로 사는가의 차이일 뿐입니다.

살펴본 바와 같이 부처와 중생은 딱 한 끗 차이입니다. 반야심경이 우리에게 가르쳐주고자 하는 핵심내용도 마찬가지입니다. 옛 선사들도 “도는 닦아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즉 도를 닦는다는 것은 있는 그대로 보고 아는 것, 아는 대로 사는 것일 뿐 그 무엇 하나 더 보태고 뺄 것이 없다는 말입니다. 결국 ‘부처로 사는가, 중생으로 사는가’는 ‘세상을, 인생을 자신을 알고 사는가, 모르고 사는가’의 차이만 있는 것입니다.

거듭 강조하지만 붓다의 삶을 창조하게 하는 기본 조건인 말하고, 듣고, 걷고, 졸리면 잘 줄도 알고, 손으로 무엇인가를 만들기도 하는 일상이야말로 진정 거룩하고 신비하고 불가사의하고 존귀한 것입니다. 우리에게 그 기본이 갖춰져 있지 않다면 아무것도 할 수 없습니다. 그 기본이 없으면 천하를 좌지우지하는 꿈을 꿀 수도 없고, 부처도, 초기불교도 대승불교도 선불교도 다 소용이 없죠. 따라서 우리에게 이미 갖춰져 있는 것들의 일상이 그대로 성스럽고 신비하고 불가사의하고 위대하고 존귀하다는 사실을 깊이 알고 확신하는 삶이 우리의 기본이 되어야 합니다.

반야심경도 굉장히 복잡한 말을 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한 구절 한 구절 짚어보면 말하고자 하는 내용은 다르지 않습니다. “지금 여기 자신, 지금 여기 내가 만나고 있는 상대 – 이 사실을 떠나서는 부처를 찾을 길이 없다. 이것을 떠나서는 신비도, 기적도, 불가사의도 없다. 혹 있다 하더라도 그것은 나에게는 쓸모없다. 삶에 도움도 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있지도 않은 것을 찾아다니는 어리석은 짓들, 있다고 해도 우리에게 아무 소용도 없는 것을 쫒아가는 짓들이 지금 우리들 인생이죠. 그래서 인생이 힘들고 고단해지는 것입니다. 반야심경은 시종일관 그 문제의식을 던지고 있습니다. 그와 같은 잘못된 구함이 헛된 것임을 알면 삶이 괜찮아질 수 있다고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그래서 반야, 즉 지혜의 경전, 더 풀이하면 <지혜의 눈을 뜨게 하는 경전>이라고 제목을 붙인 것입니다.

어떻습니까? ‘알면 풀린다. 제대로 알기만 하면 풀린다. 또는 지금 잘 풀리지 않는다 하더라도 반드시 풀린다.’는 확신만 있으면 얼마든지 해볼 수 있는 거잖아요. 그 다음은 내가 애써서 진척시키느냐 아니냐의 문제만 남는 거죠. 만일 이 방향과 이 길을 부지런히 가기만 하면 틀림없이 문제가 풀리고 희망이 만들어진다는 확신만 있으면 어렵고 힘든 것은 사실 별 문제가 안 되지 않습니까?

참 자유로 나아가는 참 지혜의 길

지금 여기, 자유자재로 관찰사유하는 참 사람 있네.
그는 참 지혜로 실천할 때
인연의 어울림으로 이루어진 다섯 무더기 모두 있지만
실제 비어있음을 잘 이해하여 대자유의 삶으로 나아갔네.

‘도일체고액(도일체고액)을 ’대자유의 삶으로 나아갔네‘라고 풀어봤습니다. 원전(原典)에는 ‘도일체고액’은 없다는 이야기도 있습니다. 번역자가 첨가한 것이라는 이야기가 있더라고요.

참 지혜의 길을 가려고 하는 사람, 사리자여,
그대 몸 그대로 실제 비어있음과 다르지 않고
비어 있음 그대로 그대 몸과 다르지 않으며
그대 몸 그대로 비어있음이며 비어있음 그대로 그대 몸이니
느낌도 생각도 의지도 분별도 그러하네.
사리자여, 모든 사람의 비어있는 참모습엔
(그대가 생각하는)
태어남도 소멸함도 더러움도 깨끗함도 늘어남도 줄어듦도 본래 없네.
마찬가지로 몸도, 느낌도, 생각도, 의지도, 분별도,
눈도, 귀도, 코도, 혀도, 살갗도, 뜻도 없네.
물질도, 소리도, 맛도, 향기도, 촉감도, 기억도,
눈의 활동세계로부터 귀와 코와 혀와 살갗과 기억의 활동세계도 없네.
알지 못함도, 알지 못함이 사라짐도,
늙고 죽음도, 늙고 죽음이 사라짐도,
괴로움도, 괴로움의 원인도, 소멸도, 소멸의 길도,
지혜도, 얻음도 없네.

얻을 것이 없으므로 보살행자는
참 지혜로 실천하는 이 길에 의지하여 마음에 걸림이 없고
걸림이 없음으로 두려움이 없어서
뒤바뀐 헛된 생각을 멀리 떠나 항상 해탈 열반의 삶을 살며
모든 붓다들도 이 길에 의지하여 깨달음의 삶을 완성하네.

그런 까닭에 알 수 있네.
이 길은 가장 신비하고 밝고 높은 진언이니
온갖 괴로움을 없애고 진실하여 허망하지 않네.
그러므로 이제 그 진언을 말하리라.
아제아제 바라아제 바라승아제 모지사바하.

반야심경에서도 지금 여기의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그런 까닭에 알 수 있네.
이 길은 가장 신비하고 밝고 높은 진언이니
온갖 괴로움을 없애고 진실하여 허망하지 않네.”

오온을 떠나서 공(空)의 길은 없다.

여기에서 ‘길’은 무엇을 말하는 것입니까? 바로 공(空)의 길입니다.
공의 길은 어디에 있습니까. 지금 여기 자신의 오온 그 자체에 있다는 말입니다. 색불이공 공불이색 색즉시공 공즉시색 수상행식 역부여시(色不異空 空不異色 色卽是空 空卽是色 受想行識 亦復如是). 그 사실을 반야심경에서는 ‘그대 몸이 그대로 비어있음과 다르지 않고, 비어있음 그대로 그대 몸과 다르지 않으며 그대 몸 그대로 비어있음이여, 비어있음 그대로 그대 몸이니 느낌도, 생각도, 의지도, 앎도 그러하네’라고 설명하고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오온을 떠나서 공의 길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많이 듣는 ‘마음이 곧 부처야’ 또는 ‘평상심시도(平常心是道)’라는 표현도 그 뜻하는 바는 다 같은 말입니다.

‘부증불감(不增不減)’ - 늘어남도 줄어듬도 본래 없네

오늘은 ‘부증불감(不增不減)’에 대해 공부할 차례죠?
우리는 대부분 늘어나는 것은 좋아하고 줄어드는 것은 싫어합니다. 그런데 반야심경에서는 그런 것은 사람의 생각으로만 있는 것처럼 보이고 실제로 그런 것은 없다고 합니다. 한 걸음 더 나아가 그런 것이 이루어지면 문제가 된다고도 하고 있습니다.

사람들이 좋아하는 늘어남도, 사람들이 싫어하는 줄어듬도 망상으로만 있고, 실제로는 없다고 딱 한 끗 차이를 말하고 있습니다.
“늘어나는 것도 있고, 줄어드는 것도 있다.”라고 하는 것이 우리들의 지식과 믿음인데 실제는 어떨까요? 중요한 것은 ‘사실을 제대로 보느냐 아니냐.’라고 했죠? 사실을 제대로 보면 어떻습니까? 분리시켜 보면 늘어난다든가 줄어든다는 말이 성립되지요. 그러나 모든 것이 연결되어 있다는 관점에서 보면 어떤가요? 하나는 늘어나고 하나는 줄어든다는 말이 성립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줄어든다, 늘어난다고 할 때 거의 습관적으로 돈 문제와 관련지어 생각하게 되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더 혼란을 느끼는 것입니다. 좋다는 약도 적재적소에 쓰면 약이 되지만 엉뚱한 데 쓰면 독이 됩니다.

돈만 놓고 보면 당연히 늘어나면 좋다고 생각하게 되죠. 하지만 인생이 돈이 전부인가요? 아까 최고인 것이 뭐라고 했습니까? 걷는 것, 말하는 것, 말하면 알아듣는 것, 잠자는 것 등등. 일상의 삶이 이루어질 수 없다면 돈이 의미가 있을까요?

조금 더 가봅시다. 돈은 늘어나는 게 좋고 줄어들면 안 좋다고 칩시다. 우리가 분리되어 있는 존재라면 돈이 늘어난 한 사람은 좋고, 줄어든 한 사람은 나쁜 것으로 끝나겠죠. 그러나 만일 서로가 분리되어 있지 않다면 늘어났다고 마냥 좋을 수만 있을까요?

상대는 불행한데, 나만 행복할 수 있을까요? 관념으로는 괜찮을 것 같지만 사실로는 그렇지 않습니다. 사실이 그럼에도 불구하고 굳이 고집을 부린다면 결과적으로 비인간적인 인간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이 세상 그 어디에도 너의 슬픔과 무관한 나의 기쁨이 있을 수 없습니다. 서로 분리된 남남이 아니기 때문에 늘어난다고 무조건 좋고 줄어든다고 무조건 나쁘고… 그렇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중생이 아프니 나도 아프다’라는 유마거사의 말씀이 전해오는 것입니다. 달리 풀면 ‘중생이 기쁘니 나도 기쁘다’가 됩니다. 그렇게 되는 이유는 진리가 그러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결국은 더불어 함께 해야 합니다. 나에게 늘어나는 것이 무조건 좋은 것이 아니라면 당연히 무조건 늘리려고 하지 않겠죠? 독점하려고 하지 않겠죠? 경험적으로 세상이치를 잘 알면 그곳에서 해답을 찾고 희망을 만들게 되어 있습니다. 이 세상 그 어디에도 함께 사는 것을 떠나서는 해답이 나올 수가 없는데, 우리는 그 한 끗을 잘 몰라서 늘 삶을 그르칩니다. 그래서 너도 고달프고 나도 고달파집니다.

목숨을 예로 이야기 해 볼까요? 우리는 죽지 않고 오래오래 살고 싶어 합니다. 모든 사람들이 갖고 있는 소원이지요. 영원불멸을 갈구하잖아요. 그런데 실제 영원불멸의 삶이 이루어지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아니 영원불멸까지는 아니더라도 수명이 한 200살까지로 늘어난다면 어떻게 될가요?

그렇게 되면 생명의 생존이 불가능해져버립니다. 생각으로는 오래 살면 좋을 것 같고 괜찮을 것 같은데 실제로는 그렇지 않습니다. 더 나아가서 실제 죽는 일이 없으면 삶의 의미가 있을 수 있을까요? 어떨 것 같으세요? 죽음이 없으면 삶이 소중한 의미로 다가올까요? (아니요.) 아니예요? 그렇다면, 삶의 소중한 의미를 알게 해 주는 죽음은 좋은 걸까요, 나쁜 걸까요? (모두 웃음)

이렇게 있는 사실을 있는 그대로 짚어보면 삶은 좋고 죽음은 나쁜 것도 아닙니다. 더 나아가 좋아하는 삶, 싫어하는 죽음은 관념으로만 있고, 실제로는 없음을 알게 됩니다. 생사가 본래 없는데 무슨 애착, 무슨 두려움이 있겠습니까. 저절로 편안하고 자유롭게 됩니다. 그렇게 알고 편안하고 홀가분하게 사는 삶을 반야심경에선 구경열반(究竟涅槃)이라고 했고, 그 삶이 완성되는 것을 아뇩다라삼먁삼보리의 삶이라고 했습니다.

불교의 문제 해결 방식

따라서 불교를 제대로 알면 문제해결방식이 달라집니다. 불교의 사유방식은 무엇인가를 없애거나 보태서 해답을 찾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자꾸 ‘이건 나쁘니까 없애서 해결하자’, ‘저건 없으니까 채워서 해결하자’는 식으로 문제를 다룹니다. 그런데 부처님은 그렇게 해서는 안 된다고 합니다. 그러면 어떻게 하는가. 있는 사실, 유아독존 본래붓다, 즉 일상의 거룩함을 알면 더 보태거나 뺄 것 없이 있는 그대로를 인정하고 창조적으로 활용하고 누리면 된다는 것입니다.

사실을 확인해보면 우리에게 주어진 것은 지금 여기의 시간과 공간과 본인 자신입니다. 그리고 이보다 더 신비한 것, 완성된 것, 불가사의한 것, 더 최고인 것, 더 위대한 것은 없습니다. 사실을 인정하고 그것을 잘 쓰는 것이 최고이고 전부라는 말입니다.

자신이 위대한 존재라는 사실을 잘 아는 것이 깨달음이고 잘 쓰는 것을 대자비의 삶, 대자유의 삶, 구경열반의 삶, 아뇩다라삼먁삼보리의 삶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물론 그것을 또 전문적으로 하나하나 개념을 따져보면 공통점도 있고 차이점도 있지만 뜻으로 본 맥락은 그렇다는 겁니다.

어떻습니까? 사실을 확인해보니까 ‘그대가 생각하는 늘어남도 줄어듦도 본래 없네.’라는 말이 맞습니까? 사실을 확인해보니 이렇게 되는 거죠. 여기서 거듭거듭 놓치지 말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우리는 보통 태어남이 따로 있고, 태어남은 좋다고 생각하고, 소멸함이 따로 있고 소멸함은 나쁘다고 생각합니다. 깨끗한 것이 따로 있고 깨끗함은 좋다고 생각하고, 더러운 것이 따로 있고 더러움은 나쁘다고 생각합니다. 늘어나는 것이 따로 있고 늘어남은 좋다고 생각하고, 줄어드는 것이 따로 있고 줄어듬은 나쁘다고 생각합니다. 반대의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의 관념과는 달리 실제로는 그렇지 않다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음을 한 마디로 공(空), 비어있다고 합니다.

반야심경의 핵심은 공(空)

반야심경의 핵심은 공, 비어있다는 한 마디입니다. 이 내용을 오온, 육근, 육경, 육식에 적용시키고 있는 것입니다. 그뿐 만이 아닙니다. 우리는 개념화된 교리에 사로잡혀 있습니다. 고집멸도, 십이연기 등 개념화된 교리들이 많지요. 어쩌면 불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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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리자님의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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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실상사 보현법회는 매달 세 번째 일요일 오전10시에 있습니다.
    현장에서 들으면 더욱 생생한 깨침이 있습니다.

관리자님의 댓글

관리자 작성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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