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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현법회 | 2019년 2월 법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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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실상사 작성일19-03-02 11:01 조회1,594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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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월 보현법회

 

일시 및 장소: 2019217일 오전 11, 실상사 설법전

 

 

회주스님 모두 법문

 

늙음도, 죽음도 애써서 잘 살아내고 맞이해야 하는 일

최근에 죽음 체험 프로그램을 한 사람들과 모인 자리에서 유언 이야기를 듣고, 나도 요즘 유언을 준비하고 있다. 나이가 들면서 보니 태어남에서 죽음까지 삶의 전반적인 과정이 어느 하나 만만치가 않다. 소년, 청년, 장년, 노년, 죽음까지도 어느 하나 심혈을 기울여 살아내지 않으면 안 되는, 내 삶 아닌 것이 없다. 누구나 겪게 되는 엄연한 삶의 실상을 경전에선 인생고해·삼계화택이라고 했다. 경전 구절이 막연한 표현이 아니라 매우 사실적이고 구체적인 내용을 담은 표현임을 실감하고 있다. 사실 우린 소년기·청년기·장년기는 다 애써 산다. 아무 의심 없이 자연스럽게 받아들인다. 마찬가지로 늙음·죽음도 애써 잘 살아내고 잘 맞이해야 하는 일이다. 그런데 우리 현실은 그렇지 않다. 소년·청년·장년까지는 애써 사는 것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는 반면, 늙고 죽는 과정은 애써 살아야 할 삶이라기보다는 왠지 허무하고 부질없고 쓸모없는 과정처럼 여기는 경향이 있다. 그 결과 남은 생을 편하게 잘 먹고 놀다 죽자는 방향 아니면, 쓸쓸하고 무기력하게 죽음이나 기다리는 모습으로 나타나고 있다.

과연 삶을 이렇게 소모해도 괜찮은 것인가, 사람들이 왜 이렇게 될까, 잘 탐구해보면, 결론은 인생을 잘 몰라서 그런 것이다. 인생을 참되게 알고 보면 처음부터 끝날 때까지 어느 한 순간도 소중하지 않은 순간이 없다. 매순간순간 자기완성과 세계완성을 위해 애써 살아야 하는 것이다. 왜 그래야 하는가. 진리가 그런 것이고 그렇게 살아야 인생이 의미 있고 멋있고 행복하기 때문이다. 젊음을 열정 다해 창조적으로 살았듯이, 늙음도, 죽음도 그에 맞게 열정 다해 창조적으로 살아야 옳다. 지혜롭고 품위 있게 어른의 삶을 살면, 스스로 보람차기도 하지만 젊은이들에게 존경과 감사의 대상이 된다. 그야말로 자리이타이다. 얼마나 좋은가. 이 자리엔 노년기에 접어드는 분들이 많이 계셔서 이 말씀을 드리지만, 젊은이라 하더라도 인생을 잘 알고 사는 지혜를 잘 갈고 닦는 것이 필요하고 중요한 것이다. 그러므로 젊은이들도 같이 고민했으면 좋겠다.

 

 

중관철학의 불교국가인 티베트에서도 있는 그대로 관찰사유하는 것이 저절로 편히 되는 일은 아니다.

누가 최근에 책을 한 권 줬다. 30년간 감옥에 있다가 나온 티베트 승려의 이야기 책이다. 티베트 사람으로 주체적이고 자유롭고 당당하게 살고자 하는 의지를 가지고 활동을 하다가 감옥살이를 30년 했다. 내가 직접 경험하지는 않았지만, 우리도 일제 36년을 경험했고, 간접적인 경험이지만 얼마나 피눈물 나는 삶이었는지 알고 있다. 그 책을 보며, 이게 과연 좋은 것인지, 안 좋은 것인지 판단이 잘 안 되었다. 티베트 사람은 거의 다 달라이라마를 신적인 존재로 믿고 의지한다. 여전히 많은 사람들은 비록 지금은 이렇지만 틀림없이 달라이라마가 곧 문제를 잘 해결하여 옛날과 같이 자유롭게 살도록 해줄 것이라는 절대적인 믿음으로 기대하고 있다고 한다. 안타깝게도 현실은 그 기대가 계속 깨지고, 내부는 심각하게 분열하고 있다. 매우 암울한 것이 현실이다.

티베트가 불교국가이고 티베트 불교의 핵심철학은 중관사상이다. 중관사상을 잘 담고 있는 용수보살의 저술이 중론이고, 중관사상의 핵심은 공이다. 용수보살은 불교역사에서 제 2의 붓다로 평가받는다. 공으로 표현되는 중관사상은 모든 종파의 사상적 근간이라고 한다. 그만큼 대단한 내용이다. 중론의 사유방식은 붓다의 중도·연기의 정신을 잘 계승하고 있다. 좀 더 쉽게 풀면, 여실지견, 있는 사실을 있는 그대로 보는 것이다. 나 자신, 상대, 기타 세상 어떤 것도 다 그렇다. 있는 그대로를 잘 관찰사유하라. 잘 관찰사유하면 존재의 참모습이 공()임이 드러난다. 그 공의 정신으로 삶을 살면 인생이 자유롭고 평화로워진다고 하는 것이 중관사상이고 티베트 불교의 핵심사상이다.

현실적으로 보면 달라이라마도 사람이다. 그런데 티베트 사람들은 달라이라마를 신으로 생각하고 있다. 있는 그대로 관찰사유하라는 것이 중관 불교의 핵심인데, 티베트 현실은, 티베트 국민들은 이 중관의 가르침과는 관계없이 거의 맹목적일 정도의 신앙심으로 살고 있는 것을 보며, 붓다의 가르침을 일반대중의 현실 삶에 구현하는 것이 보통 일이 아니구나 하는 생각을 다시 하게 된다. 그런 의미에서 반야심경 이야기를 잠깐 해볼까 한다.

 

 

불교가 어렵고 복잡한 이유: 있는 그대로 주의깊게 관찰사유하지 않기 때문. 있는 그대로 보면 사람이 곧 붓다!

반야심경 첫 구절이 관자재보살 행심반야바라밀다시 조견오온개공 도일체고액이다. 관자재보살은 무엇을 하는 사람인가. 지금 여기 있는 사실을 잘 관찰사유하는 사람. 즉 행심반야바라밀다의 사람이다. 있는 사실을 있는 그대로 잘 관찰사유한다. 관찰한 내용이 무엇일까? 오온이다. 오온은 지금 여기 각자 자기 자신이다. 지금 여기 나라고 하는 존재가 인연화합으로 이루어진 실체 없는 오온이다. 그러기 때문에 이것만이 나야, 진짜야, 최고야, 이것은 내려놓을 수 없어하고 붙잡을 것이 아무것도 없다. 그것을 공이라고 표현한다. ‘오온이 다 공함을 잘 파악하고 이해하고 말하고 행동하고, 마음쓰고 살면, ‘도일체고액’, 일체 고난과 액난으로부터 자유롭고 편안해질 수 있다고 하는 것이 불교의 전부이다. 어떻게 보면 아주 단순한 이야기이다. 초기경전이라고 하는 니까야나 아함을 보면, 정형화된 표현이 있다. ‘나의 진리, 나의 가르침은 함께 얘기를 나눌 경우, 누구나 바로 이해할 수 있다. 그대로 하면 틀림없이 바로 실현된다. 정말 실현되는지 바로 확인이 가능하다.’라고 하고 있는 것을 보면 불교는 결코 복잡하고 어려운 것이 아님을 확인할 수 있다. 그런데 우리 현실은 해도 해도 잘 안 된다, 모르겠다, 복잡하고 어렵다고 한다. 개인적 경험으로는 붓다의 말씀은 중도적으로 공부하기만 하면, 또는 뜻으로 잘 살펴보면 누구나 바로 이해할 수 있고, 현실에서 바로 이루어지고, 검증할 수 있다.’는 붓다의 말이 틀림없다고 본다. 실제 이루어지는 내용을 말로 표현하고 있지, 해도 안 되는 내용을 표현하고 있지 않다. 그러면 왜 잘 안 될까? 잘 안 되는 핵심 이유는 중도적으로 주의 깊게 관찰사유하지 않는데 있다.

여러 번 한 이야기인데, 극락전에 가면 주련이 있다. 내용을 보면, 깨달은 붓다는 어떻게 생겼는지, 어떻게 살았는지에 대한 설명이다. 붓다는 어떻게 생겼는가 하고 물으니, ‘정천각지 안횡비직(頂天脚地 眼橫鼻直)’ 머리는 하늘을 향해 있고, 두발은 땅을 딛고 있으며, 두 눈은 가로로 놓여있고, 코는 세로로 곧게 서있다. 무슨 말인가. ‘사람이 바로 붓다라는 이야기이다. 그럼 그 붓다는 어떻게 사는가? ‘반래개구 수래함안(飯來開口 睡來含眼)’ 밥이 오면 입을 열고, 졸음이 오면 눈을 감는다. 본인들은 어떻게 하시나? 졸음이 오면 눈을 부릅뜨고 밥이 오면 입을 앙다무나? 우린 붓다와 반대인 중생이니까? 그렇지 않다. 보통 사람인 여러분들의 살림살이와 붓다의 살림살이가 다를 것이 아무것도 없다. 달라이라마도, 관세음보살도 다 마찬가지이다. 선사들은 좀 더 구체적으로 묻고 답하고 있다. 그대 무엇이 부족한가? 그리고 무엇이 안 되는가? 인간은 두 눈으로 보며 살게 되어 있다. 보는데 눈 두 개로 부족한가? 10개나 필요한가? 너무 많은가 너무 적은가? 두 개면 충분하지 않은가? 눈이 두 개 뿐이어서 좋아하는 애인을 못 보는가? 그 정도면 충분하지 않은가? 친정에 가야하는데 두 발로 안 되는가? 충분히 갈 수 있지 않은가? 발이 백 개이어야 할까? 상상만 해도 끔찍하다. 두 발이면 충분하다. ‘불완전하다, 부족하다, 안 된다는 생각 자체가 무언가를 잘못 알고 잘못 생각하기 때문에 생기는 문제인 것이다. 마음먹고 보면 즉각 보인다. 친정집에 가고 싶어서 걸으면 틀림없이 가진다. 있는 사실을 확인해 보면 안 되는 것 없다. 그런데도 우리들은 본인이 하고 있는 것들을 주의깊게 관찰하지 않는 문제가 있다. 하기만 하면 틀림없이 된다. 다만 안 되어서 불만족스러운 것은 욕심 때문이다. 한 만큼은 반드시 되지만 욕심대로는 절대로 안 된다. 우리는 욕심에 사로잡혀 살다보니, 실제 있는 그대로를 관찰사유하지 않는다. 그러기 때문에 대단한 존재임에도 그것을 모른다. 하면 즉각 되는데도 그것이 안 보이는 것이다. 왜 그럴까? 있는 그대로 보지 않고 욕심대로 보기 때문이다. 그것을 반야심경에서는 전도몽상이라고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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