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월 보현법회-최고의 청법은 잘 묻는 것-잘 묻고 실천하면 참자유, 참평화의 삶이 이루어진다 > 법회와 설법

본문 바로가기


법공양

보현법회 | 8월 보현법회-최고의 청법은 잘 묻는 것-잘 묻고 실천하면 참자유, 참평화의 삶이 이루어진다

페이지 정보

작성자 실상사 작성일19-10-18 16:04 조회105회 댓글0건

첨부파일

본문

8월 보현법회

 

일시: 818일 오전 1030

장소: 실상사 설법전

 

가을기운이 완연합니다. 오늘 아침에 오신 손님들과 차 한 잔하면서 요새 세상 현상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그 내용이 정신 차릴 수 없을 정도로 새로운 것들이 어마어마하게 계속 만들어지고 사람들의 삶의 방식도 예측하기 어려울 정도로 빠르게 변화하고 있었습니다. 나는 세상 변화에 따라가는 것을 포기하고 살아서 그런지 들어도 구체적으로는 잘 모르겠더군요. 다만 들으면서 인간은 어쩔 수 없나, 왜 모두 사서 고생을 할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사람들은 좋다고 쫓아다니는데 내용을 들여다보면 별 것도 아닌 것을 쫓아다니느라 바쁘고 수고롭고 더 애써서 무엇을 할 수밖에 없어요. 그야말로 사서 고생한다고 밖에 달리 뭐라고 할 수 없습니다.

 

최고의 격을 갖춘 청법은 잘 묻는 것!

우리가 법문을 들으려고 청법가를 불렀는데 실제 2700여 년 전 부처님은 어땠을까요? 청법가를 듣고 법문을 하셨을까요? 잘 모르시겠죠? 청법가 내용으로 보면 사자좌에 올라서 법문을 하셨다는 이야기잖아요. 어쨌든 우리가 최고로 거룩하게 모시는 분이 부처님인데 실제는 어땠을까요? 사실 이런 물음을 물으면서 불교 공부를 해야 합니다. 그래야 쓸데없는 환상을 만들지 않게 되고 환상에 빠지거나 쫓는 일이 없게 됩니다. 헛수고를 하지 않게 된다는 말입니다. 경전상으로 보면 부처님은 법문할 때 격을 잘 갖추어서 하신 것으로 보입니다. 그 격을 갖추는 것이 실제로 가능했을까요? 인도를 가봐서 알겠지만 지금도 인도 촌락에 가보면 기가 막히거든요. 지금도 그런데 부처님 당시에는 어땠을까요? 처음에는 절도 없었습니다. 길을 걸어가다가 사람들이 이야기하자고 청하기도 하고 뭘 물어오면 적당한 곳에 둘러 앉아 대화했습니다. 부처님께 최고의 격을 갖춘 청법은 진지하게 잘 물어보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니까 최고의 청법은 잘 물어보는 것인 셈이죠. 금강경도 수보리가 잘 묻는 것으로부터 시작하고 있잖아요. 그런데 우리는 형식적인 격식은 그럴 듯하게 갖춰놓았어도 진지하게 묻는 경우는 거의 없습니다. 잘 묻고 따져본다는 것은 본인이 무엇인가를 골똘하게 탐구한다는 이야기잖아요. 삶에 대해 진지하게 탐구하면 당연히 궁금한 것이 생기고 따져 묻게 되죠. 따라서 탐구하는 자세로 질문을 하면, 대답하는 사람도 훨씬 공들여 설명하게 되고 듣는 사람도 훨씬 더 깊이 듣고 새기게 됩니다. 깊이 듣고 깊이 새겨야 법문의 내용이 내 피가 되고 살이 됩니다. 그렇게 하면 법문 듣는 것 자체가 최고의 수행이 됩니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우리는 탐구하는 물음이 없이 진행하게 되니 이야기를 하는 사람도 듣는 사람도 대충대충 하게 됩니다. 그렇게 하면 법문 듣는 것이 수행은커녕 들어도 그만, 듣지 않아도 그만이 되고 맙니다. 그러기 때문에 그렇게 되지 않도록 해보려고 일부러 질문하는 방식의 이야기를 하는 것입니다. 부처님께 청법하는 최고의 격은 잘 묻는 것이라는 이야기입니다. 아까 언급한 금강경에서도 수보리가 아뇩다라 삼먁삼보리심을 일으킨 사람은 어떻게 생각하고 어떻게 마음쓰고 살아야하느냐고 묻습니다. 최고의 청법은 거창하게 폼 잡는 격식이 아니고 삶에 대해 꼼꼼히 탐구하고 잘 질문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이야기를 하는 것입니다.

 

자유와 평화에 대한 왜곡된 이해와 기대가 낳은 탐진치로부터 벗어나려면?

오늘 무슨 이야기를 해야 할지 막막했습니다. 엊그제도 법회를 했고 해서 무슨 이야기를 할까 궁리하다가 우리가 늘 반야심경을 독송하고 있으니 되새김질 하는 것도 괜찮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잘 아는바와 같이 반야심경에 보면 관자재보살 행심반야바라밀다시 조견 오온개공 도일체고액이라는 내용이 있습니다. 이 내용이 반야심경의 핵심, 불교의 핵심, 또는 반야심경의, 불교의 전부라고 해도 무방합니다. 풀어보면 관자재보살이 반야바라밀다를 깊이 실천할 때 오온이 텅 비어있음을 잘 관찰 사유한다. 잘 관찰 사유해서 오온이 텅 비어있음을 잘 이해하고 알게 된다. 잘 알면 어떻게 되는가? ‘도일체고액우리가 벗어나고 싶은 일체고난과 액난으로부터 자유로워지고 평화로워진다.”는 이야기입니다. 일체고난과 일체액난으로부터 자유로워지고 편안해지면 되는 거잖아요. 그렇죠? 충분하잖아요.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죠. 그런데 우리는 왜 반야심경 공부를 많이 하고 늘 반야심경을 많이 외우는데도 편안해지고 자유로워지지 않을까요? 왜 그럴까요? 저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을 거라고 봅니다. 그 중에서도 우리가 특별히 놓치고 있는 부분이 자유롭게 되고 평화롭게 된다는 말에 대한 왜곡된 이해와 기대들이 너무 심한 까닭입니다. 분명 일체고난과 액난으로부터 자유로워지고 평안해진다. 이때 자유롭고 평안해진다고 하는데 과연 실제 내용은 어떨까요? 한번 짚어봅시다. 평소 우리는 습관적으로 자유롭다는 말과 평화롭다는 말에 대해 특별한 환상을 갖고 있는 듯합니다. 그러기 때문에 지금 목전에서 자유와 평화가 이루어지고 있는데도 이 사실을 모르고 이것 말고 더 신나고 짜릿하고 통쾌하고 좋은 것을 찾으려고 합니다. 지금 당장 확인해봅시다. 지금 편안하십니까? 불편하십니까? 자유로우십니까? 답답하십니까? 괜찮은가요? 그렇죠? 괜찮죠. 그러면 된 거 아닌가요? 이만하면 됐지 또 뭘 더 찾습니까. 그런데 우리는 안타깝게도 심심한 이런 자유와 평화 말고 뭔가 더 짜릿하고 통쾌하고 휘황찬란한 것을 찾고 있습니다. 실제 지금 여기 현장 내용을 잘 관찰해 보면 사람마다 차이는 있겠지만 결론적으로는 편안하고 자유로운 괜찮은 상태입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지금 누리고 있는 편안함과 자유로움에 만족하지 못하고 자꾸 머리 속에 들어 있는 환상적인 무엇이 있어야 된다고 하는 것이죠. 이게 문제입니다. 더 특별한 것, 더 삐까번쩍한 것, 더 짜릿하고 재미있고 신나는 것이 있어야 된다고 하면서 그것에 사로잡혀 있는 거죠. 실제 내용을 사실적으로 확인해보면 감각적으로 재미있고 신나는 것은 대부분 고통과 불행의 원인으로 작동하는 탐진치 삼독의 또 다른 얼굴일 뿐입니다. 그러므로 저는 이 부분을 정리하지 않으면 우리가 아무리 불교 공부를 하고 수행을 한다고 해도 헛꿈을 찾아 헤매는 삶이 끝나지 않는다고 봅니다. 경의 제목이 반야바라밀다심경이라고 되어있는데 그 말을 쉽게 다른 말로 바꾸면 깨달음으로 실천하면, 깨달음을 실천하면, 지혜롭게 실천하면, 지혜로 실천하면이 됩니다.

더 풀어 보겠습니다. 지금 여기, 자신의 참모습을 있는 그대로 잘 관찰해 보면 오온이 다 텅 비어있다 또는 삶도 죽음도, 젊음도 늙음도, 좋음도 나쁨도, 유리함도 해로움도 다 마찬가지다. 그러므로 그 모든 것으로부터 편안하고 자유롭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러니까 제일 중요한 것은 결국은 자기 존재를, 자기 삶을 살고 있는 그대로 잘 관찰하고 이해하여 실천하는 것이 불교 수행의 핵심이라는 의미입니다. 불교적으로 설명하자면 중도의 팔정도 사유방식으로 잘 관찰사유하면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내 자신이, 내 자신의 삶을, 내 자신이 서 있는 현장을 잘 관찰사유하여 이해하고 보면 그 안에 내가 찾고 있는 편안함도 자유로움도 있다는 이야기이죠. 그런데 우리는 자꾸 다른 곳에서 해답을 찾으려고 해요. 이런 현상을 선사들은 소를 타고 소를 찾는다고 나무라십니다. 그 전에도 이야기했었는데 하나는 삼조승찬대사의 저술인 신심명이고 다른 하나는 영가스님의 저술인 증도가인데 깨달음을 노래한 것입니다. 영가스님은 육조스님의 제자이고 승찬스님은 해가스님의 제자입니다. 영가스님은 증도가에서 참된 진리에 나아가고자 하면 육진(六塵), 눈에 보이는 색, 귀에 들리는 소리, 코로 맡는 냄새, 혀로 느끼는 맛, 피부에 닿는 대상, 마음에 떠오르는 생각을 좋아하거나 싫어하지 않으면 그 상태가 바로 정각이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정각자하면 무엇이 떠오릅니까? 최고의 깨달음을 이루신 부처님이 생각나죠? 그렇습니다. 바로 부처인 것이죠. 그런데 우리는 살아보면 어떻습니까? 끝없이 대상과 싸우고 있습니다. 좋은 것을 만나면 천하를 얻은 것처럼 좋아하고 나아가 더 좋은 것을 얻으려고 더 큰 욕심을 부리느라 바쁘고 힘들고, 싫은 것을 만나면 천하를 잃은 것처럼 죽을상을 짓고 나아가 싫은 것을 없애려고 더 큰 싫은 마음, 미운 마음, 화내는 마음 때문에 바쁘고 힘들어서 어느 한순간도 편안하고 여유로울 겨를이 없습니다. 겨울에는 추위, 여름에는 더위, 화장실에서는 냄새에 끊임없이 좋다 나쁘다, 마음에 든다 들지 않는다. 하고 시시비비하느라 바쁘고 힘들고 그러면서 못살겠다고 하고 또는 너 때문이라고 싸움질하는 것이 우리 삶의 실상입니다. 그러니 어느 한순간도 편안하고 여유로울 수가 없습니다. 계속 분주하고 괴롭지요. 마음에 들어 들지 않아, 이겼어 졌어, 빼앗겼어 빼앗았어 등 시비에 휘둘리지 않고 놀아나지 않아야 하는데 우리는 거의 습관적으로 그 안에서 맴돌고 있는 것입니다.

비슷한 내용이 승찬스님의 신심명에도 나옵니다. “참된 진리는 어려울 것이 없다. 오직 분리시켜 하나는 버리고 하나는 취하는 사고방식만 버리면 조용히 있어도 괜찮고 땀 흘려 활동해도 괜찮다라고. ‘증애심좋아하고 싫어하는 마음만 내려놓으면 늘 좋은 날이 된다는 이야기입니다. 이 말을 다시 반야바라밀로 연결시켜 봅시다. 반야바라밀, ‘결국 지금 여기, 자신의 참모습, 자신의 삶 자체를 중도적으로 관찰해보니, 지혜롭게 관찰해보니, 정신 차려서 단단히 마음먹고 잘 관찰해보니,’ 이런 이야기입니다. 우리들이 여름 안거 내내 한 이야기가 무엇입니까? ‘삶도 빛나고 죽음도 빛나라, 젊음도 빛나고 늙음도 빛나라, 편안함도 빛나고 고단함도 빛나라라고 했잖습니까? 그 말을 달리 표현하면 그래 괜찮다. 이런 말인 거죠. 괜찮다는 것은 편안하고 자유롭고 좋다는 이야기인 것입니다. 결과적으로 우리가 자유로워지고 편안해지고 여유로워지려면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까요? 결국 자신의 참모습 자신의 삶 자체를 잘 관찰사유해서 내용을 잘 이해해야 합니다. 그렇게 하면 삶이니 죽음이니 늙음이니 젊음이니 하고 집착하지 않게 됩니다. 당연히 날마다 좋은 날이 됩니다. 마찬가지로 그렇게 하면 육진에 대한 집착도 내려놓게 되고 하나는 버리고 하나는 취하려는 마음도 내려놓게 됩니다. 당연히 편안하고 홀가분해지죠. 그렇게 되도록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전통적으로 계정혜 삼학을 균형있게 실천해야 한다고 이야기 하고 있습니다. 계정혜 삼학은 평소 일상적으로 계율은 늘 자비로운 마음으로 삶을 다루는 것이 기본바탕이고 선정은 흔들림이 없는 평정함으로 삶을 다루어야하는 것이 기본바탕이고 지혜는 알아야 할 자신의 참모습을 잘 이해하는 앎으로 삶을 다루는 것이 기본바탕입니다. 돌이켜 생각해봅시다. 평소 우리는 어떻습니까? 거의 자동적으로 비난의 소리가 귓가에 스쳐 지나가면 바로 온몸과 마음이 비참하게 흔들리고 칭찬의 소리가 귓가에 스쳐 지나가면 정반대로 흔들리지 않습니까? 더 나아가 붉으락푸르락하면서 씩씩거리고 너 때문이야 무엇 때문이야 하며 전전긍긍하게 됩니다. 어떠세요? 평안할까요? 홀가분할까요? 맛있는 것을 먹은 들, 좋은 음악을 들은 들 좋을 리가 없지요.

부연하면 실상, 자신의 참모습, 삶 자체를 잘 파악하고 이해하는 것이 지혜이고 그 이해된 내용이 언제나 흔들림 없는 것이 선정이고 그 내용대로 생활하는 것이 계율인 것입니다. 한마디로 요약하자면 언제 어디에서나 세상을, 무엇을, 누구를 탓하는 종이 아니라 당당하게 책임지는 주인으로 살아갈 때 그 삶이 괜찮다는 이야기입니다. 일찍이 임제선사는 언제 어디에서나 주체적으로 살면 그 삶이 참되다라고 말했습니다.

 

태양처럼 조건 없이 기꺼이 실천하는 것이 최고의 수행

  • 페이스북으로 보내기
  • 트위터로 보내기
  • 구글플러스로 보내기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

게시물 검색

Copyrights ⓒ www.silsangsa.or.kr. All rights reserved  주소 55804 전북 남원시 산내면 입석길 94-129
(대표메일) silsang828@hanmail.net (전화) 063-636-3031 (팩스) 063-636-377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