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안거결제법문] 간화선, 팔만사천법문을 압축하고 녹인 용광로 > 법회와 설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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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타법문 | [하안거결제법문] 간화선, 팔만사천법문을 압축하고 녹인 용광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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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실상사 작성일21-05-27 18:29 조회94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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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65(2021)년 하안거 결제법문 : 실상사 회주 도법스님 

  

간화선, 팔만사천법문을 압축한 용광로

간화선 3대 요체 : 대신심(大信心), 대분지(大憤志), 대의정(大疑情)을 말하다

 

 


 

* * * * *

다시 여름안거를 맞이했습니다. 살면서 다들 여러 가지 일을 하는데, 그중에서 어쨌든 스님들에게 또는 이 산중에서 내게 부여된 가장 대표적인 일이 법문하는 일 같아요. 법문이라고 하는 것은, 듣는 사람들에게 삶의 안목을 열게 하고 환하게 "아! 저 방향으로 그 길을 그렇게 걸어가면 되는 것이구나." 이렇게 불신이나 의심이나 혼란스러움을 걷어내도록 해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제일 어려운 일이 법문하는 일이라는 생각을 합니다. 스스로 부끄러운 마음도 있고 또 사람들에게 미안한 마음이 들기도 하고요. 근래에는 나이가 드니까 그 부분에 대한 어려움이 더하더라고요.  

 

오늘도 주어진 소임의 하나로서 법문을 해야 되는데, 무슨 얘기를 해야 될까 궁리를 해봤습니다. 마침 이번에는 코로나 상황 때문에 스님들만 모여서 안거의식을 한다고 하니, 간화선 이야기를 해봐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간화선이 요즘은 별로 인기가 없는데, 제 개인적으로는 선방에 살지 않지만 어쩌면 불교 사상과 정신을 대단히 잘 압축해서 녹여낸 것, 대단히 현실적이고 실용적인 즉각적인 효과를 이룰 수 있도록 하는 것이 간화선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요즘 간화선을 가볍게 취급하는 경향이 좀 있는 것 같은데, 저는 이 부분을 가볍게 생각하지 않아야 된다고 생각합니다. 어쩌면 더 공을 들여서 정말로 한국불교의 전통이기도 한 간화선이 무엇인지 정말 공들여서 같이 공부도 하고 많은 대화와 토론을 통해서 학습도 하고 연마도 해야 합니다. 

 

오늘 말씀드리는 간화선이야기는 다른 분들과는 관계 없고 제 나름대로 정리해본 것입니다.

 

 

간화선 3대 요체 : 

대신심(大信心), 대분지(大憤志), 대의정(大疑情)

 

보통 간화선을 설명할 때, 간화선 3대 요체로 대신심, 대의정, 대분지를 말합니다.

 


1. 대신심(大信心) 

▲ 자신의 참모습이 본래부처라는 이해와 확신

▲ 본래부처에 대한 이해와 확신으로 불교수행을 하면 즉각 이루어진다는 믿음

 

저는 간화선이 제대로 되려면 "대신심"을 바르게 정의하는 게 핵심이라고 보고 있습니다. 제가 그동안 보고 배운 것을 기억을 더듬어 보면 그 부분이 늘 아쉬움으로 남아있어요. 

제 나름대로 정리를 한 것은 보통 우리가 선방에서 본래면복을 찾아야 된다. 본래 면목을 깨달아야 된다. 등등 이런 표현을 많이 하기도 하고 또 다른 개념으로는 본래부처를 잘 알아야 된다 이런 얘기를 많이 하는데 저는 본래면목이라고 표현이 되든, 본래부처라고 표현이 되든. 제 나름대로 정리한 바에 의하면 부처님이 깨닫고 제시한 중도, 연기의 세계관과 실천론에 토대해서 표현되어 지는 게 본래부처의 개념이고 본래면목의 개념이라고 생각합니다.

 

어쩌면 부처님이 깨달아서 우리에게 알려줬던 중도연기의 세계관과 실천론을 실천주체의 개념으로 표현되어진 것이 ‘천상천하 유아독존’입니다. '본래부처', '본래면목'이라는 표현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거의 습관적으로 ‘인간은 죄 많은 업보중생이야‘ 우리는 이 전제 위에서 불교를 하고 있는데, 제가 우리 종묵스님이 주신 <달마어록>을 보니 ’견성하지 않고 하는 것은 불교가 아니다.‘는 이야기가 있더군요. 저는 본래부처론이 이런 맥락하고도 연결이 된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대신심이라는 말속에 첫 번째 들어가야 할 내용은 이 부분이라고 생각합니다. 자신의 본래 참모습. 자신의 본래 면목, 본래 부처 이런 표현들. 존재 자체가 또는 자기자신 자체가 본래부처라는 사실에 대해서 적어도 우리의 상식과 지성으로 학습하고 탁마해서 아! 그렇구나. 잘 이해하고 확고하게 확신하는 것. 대신심이라는 말속에 들어야 할 첫 번째 들어가야 내용이라고 생각합니다.

 

대신심이라는 말속에 들어야 할 두 번째는 본래부처에 대한 확신으로 우리가 불교수행을 해가면 반드시 즉각즉각으로 효과가 이뤄질 수 있다고 하는 내용에 대한 확신을 가져야 한다는 것이죠. 본래부처라고 하는 이해와 확신에 토대해서 그 정신에 맞춰서 우리가 불교수행을 해가면 하면 한만큼 즉각즉각 효과가 이뤄지는 것이 불교수행이다. 어쩌면 우리가 화두라고 하는 것과 연계시켜 보면 화두 드는 것 자체가 부처행 인거죠. 깨닫기 위한 것도 아니고 삼매에 들기 위한 것도 아니고 바로 부처로써 지금 여기에 바로 존재할 수 있도록 하는 행위가 화두 드는 행위로 표현된 거죠.

 

이런 내용을 경전과 연결시켜서 해석을 해본다고 한다면 금강경 내용 중에 보면 그 말을 달리 표현하면 무주상행의 구체적 실천이라고 표현할 수 있고 응무소주 이생기심으로 표현되어지는 내용을 바로 즉각 즉각 실천하는 행이다. 이렇게 해석할 수도 있다고 봅니다.

 

그래서 간화선의 3대 요체라고 할 때 '대신심'이라는 말로 표현되어 지는 그 속에 들어있는 아주 중요한 핵심 내용을 전 두 가지 정도로. 물론 여기에 더 보탤 수는 있습니다.  "본래부처에 대한 이해와 확신으로 불교수행을 했을 때, 즉각 즉각 바로바로 편안해질 수도 있고, 자유로워질 수도 있고, 바로바로 효과를 낼 수 있다." 그것이 무르익고 무르익으면 그 다음은 더더욱 절로절로 흘러가겠죠. 아마 그렇게 절로절로 흘러가는 상태를 정각의 삶이라고 표현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저는 그렇게 해석하고 있습니다.

 

 

2. 대분지(大憤志) : 진실하고 정성스럽게 끊임없이 매순간 

 

두 번째는, 대분지입니다. 

'대분지' 하면 우리는 굉장히 장좌불와를 해야 하고 용맹정진을 해야 되고 주로 이런 생각을 떠올리게 됩니다. 저는 그런 '대분지'라는 말 속에 들어있는 내용은 아주 진실하고 정성스럽게 정말 간절하게 그리고 차분하게 침착하게 평온하게 줄기차게 지속적으로 끊임없이 매순간순간 이런 의미를 담고 있는 게 '대분지'라고 봅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 말에 속아서 대분지라는 말에 속아서 극기 훈련하듯이 뭔가를 해야 하듯이 다뤄지는 경우가 너무 많습니다. 그것이 가져오는 폐단은 예를 들자면 무수하게 폐단을 들 수 있습니다. 그래서 '대분지'라는 말 속에 들어있는 내용들을 보면 요즘에 위빠사나, 명상... 이런 얘기를 들어보면 거기에서 중요하게 다뤄지는 내용이 그 한 마디에 다 담겨 있다고 봅니다. '대분지'라는 말속에.

 

 

3. 대의정(大疑情) : 화두는 모든 의심을 녹이는 용광로

 

그 다음에 대의정입니다. 이건 그야말로 화두를 드는 거잖습니까? 이뭣고? 하고 화두를 들기도 하고 정전백수자(뜰앞의잣나무) 하고 화두를 들기도 하고. 불법의 심오한 뜻이 무엇입니까? 불법의 참뜻이 무엇입니까? 조사가 서쪽에서 온 본의가 무엇입니까? 

 

이게 사실은 말하고자 하는 내용은 같은 내용들이죠.  진짜 불교가 뭐요? 불교불교 하는데 그게 뭐야? 대승불교가 있다. 부파불교가 있다. 선불교가 있다. 교학불교가 있다. 초기불교가 있다. 남방불교 있다. 북방불교가 있다. 온갖 이름으로 불교 얘기들이 이뤄지고 있는데 진짜가 뭐요? 하는 물음인 거죠. 그중에 특별한 하나가 진짜요? 아니면 내 것만 진짜요? 아니면 전체가 다 진짜요? 진짜가 뭐요? 라고 묻는 거거든요. 아주 단도직입적으로, 도발적으로. 

 

저는 이 질문을 하는 사람들이 불교에 대한 상식을 전혀 가지고 있지 않다고 보지 않습니다. 오히려 기존 불교에 대해서 나름대로 교리적인 지식들, 교리적인 이해와 인식들이 높고, 수행을 해보는데 뭔가 시원하지가 않다, 확연하지가 않다, 오리무중이다, 불교를 얘기하고 있지만 하는 사람도 듣는 사람도 혼란 속에 헤매고 있다, 그러니 어떻게 갑갑해서 물어보는 거죠. 그러니 매우 절실한 마음으로 묻게 되는 거죠. 진짜 불교가 뭐요? 더 좁히면 진짜 중노릇이 뭐요? 진짜 비구가 어떤 거요? 본인이 얼마나 절실하면 이런 질문을 할 수 밖에 없겠습니까. 

 

그런 질문에 대해서 ‘뜰앞의 잣나무’라고 답하기도 하고 ‘똥막대기’라고 하기도 하고 정말 여러 형태로 답을 하지요. 그것을 우리는 화두라고 합니다.  

 

대의정이라고 할 때, 우리는 이 '크다'는 말에 또 속습니다. 대신심, 대분지, 대의정이 다 그렇지요. 크다는 말 때문에 엉뚱한 해석들을 하게 됩니다. 물론 크다는 말속에는 이런저런 뜻이 다 담겨있으니 해석도 여러 가지로 가능하겠지요. 

 

저는 대의정이라는 말은 "본래부처, 중도연기, 또는 본래부처, 본래면목으로 표현되어진 불교 세계관과 정신에 맞게 매순간순간 마음 쓰고 행동해야 된다"는 말로 해석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렇게 해석된 모든 것이 압축되고 압축되어 화두로 나타난 거죠. 그걸 우리는 대표적으로 ‘이뭣고’라고 합니다. ‘무’라고 하니 ‘왜 무라고 했을까?’, ‘뜰 앞의 잣나무‘라고 하니 ’왜 뜰앞의 잣나무라고 했을까?‘ 그래서 앉으나서나 자나깨나 매순간순간 그것을 붙잡고 있습니다. 이렇게 의심하고 또 의심하고 또 의심하고 이런 거죠. 앉아서도 하고 일어서서도 하고 걸으면서도 하고 자면서도 합니다. 할 수 있는 한 나의 모든 존재를 바쳐서 화두를 드는 거죠. 

 

화두는 용광로다


이 화두는 용광로라고 했습니다. 용광로가 뭡니까? 뭐든지 들어오면 다 녹여 버리는 거죠. 대승불교도 들어오면 녹이고. 선불교도 녹이고. 초기불교도 들어오면 녹이고. 교학불교도 들어오면 녹입니다. 그 뿐이겠습니까? 기독교도 들어오면 녹이고, 유교도 들어오면 녹이고, 과학도 들어오면 녹입니다. 어쩌면 우리 삶에서 우리가 직면하고 있는 그 어떤 것도 어떤 하나도 예외 없이 거기 들어오면 다 녹아 떨어져 나간다는 거죠. 

 

예를 들어 이런 걸 초기불교식으로 연결시켜서 보면 "중도적으로 하면 양극단이 다 떨어져 나간다"고 합니다. 그렇게 연결시켜 보면 화두 드는 것 자체가 바로 중도행이라고 할 수 있지요. 그 자체가. 따라서 그것은 붓다행인 거죠. 붓다는 어떤 사람입니까? 일생으로 중도행으로 살아간 사람입니다.

 

이런 것들을 다 녹여낼 수 있는 게 화두로 드러나고 있습니다. 용광로라고 하는데 이것을 뭐로 비유하고 있는가? 똥파리와 연결시켜 비유하고 있습니다. 똥파리라고 하는 놈은 세상에 못 가는 데가 없습니다. 부처님 머리에도 가고, 임금님 얼굴에도 가서 앉기도 하고. 좋은 사람 나쁜 사람, 남자 여자, 잘난 놈 못난 놈 가리지 않습니다. 임금이네 부처네 하면 세상 최고지 않습니까? 그래도 똥파리는 아랑곳하지 않고 앉습니다. 어디 그 뿐이겠어요? 더 더러운 곳, 똥구덩이에도 가고, 시체한테 덤벼들기도 하고, 똥파리라고 하는 놈은 정말 못 가는 데가 없습니다. 

 

그런데 똥파리가 딱 한 군데 못 가는 데가 있습니다. 용광로입니다. 여기서 똥파리는 뭘 말하고 있을까요? 바로 우리가 늘 문제 삼고 있는 분별망상입니다. 분별망상도 마찬가지입니다. 못 가는 데 없습니다. 다 갑니다. 다 가는데 화두라고 하는 용광로에서는 녹아날 수 밖에 없습니다. 그것이 먼 훗날 화두가 타파된 다음에 가서 해결 되는 게 아니라 화두를 든 순간 바로바로 녹아 떨어질 수밖에 없다는 거죠. 바로바로. 증오도 녹고, 분노도 녹고, 자비도 녹고, 이익도 녹고, 손해도 녹고, 큰 것도 작은 것도, 너도 나도, 옳은 것도 그른 것도, 좋은 것도 궂은 것도, 이 세상은 어떤 것도 예외 없이 화두라는 용광로에 오게 되면 다 녹아떨어지게 됩니다. 

 

이게 얼마나 놀랍습니까? 이런 내용들을 좀 세밀하게 치밀하게 하나하나 짚어서 정리를 해보면 이것이 특별한 상황에서 벌어지는 일이 아니라 한번 하면 한번 하는 그 자리에서 바로 그 순간, 두 번 하면 두 번 하는 만큼의 바로 그 순간, 즉각즉각으로 분별망상이 녹아떨어지도록 되어 있는 게 화두라는 것이죠. 

 

간화선, 팔만사천법문을 압축해서 단순명쾌하게 제시한 것.

 

그러니깐 어쩌면 팔만사천 법문으로 표현되어지는 불교와 불교수행을 아주 잘 압축해서 녹이고 녹여서 아주 단순명쾌하게 제시하는 것이 간화선인거죠. 

 

그런데 불행하게도 우리가 옛스승들께서 정말로 피땀을 흘리면서 후학들에게 이렇게 잘 제시해줬는데 정작 그 후손들이 그런 본뜻을 제대로 연구하고 탐구하고 제대로 잘 소화시켜야 되는데 그걸 못하고 건성건성 엉뚱하게 온 거죠. 그러면서 괜히 원망하게 된 거죠. 

 

대의정이라고 하는 말도 아까 '대분지' 할 때처럼 화두를 할 때 이건 아무 조건이 없습니다. 깨닫기 위해서 화두 드는 것도 아니고 부처 되기 위해서 화두를 드는 것도 아닙니다. '본래부처'에 대한 이해와 확신을 가지면 깨달음의 문제나 부처가 되는 문제는 명료하게 정리될 수 있습니다. 본래부처에 대해 정리가 되면, 이미 정리가 되었기 때문에 화두하는 자리에 굳이 깨달음을 이루네, 부처가 되네... 이런 것들이 끼어들 필요가 없어요. 그것을 우리가 교리적 개념으로는 삼해탈(三解脫) - 공(空), 무상(無相), 무원(無願)이라고 하죠. 다른 표현으로는 <반야심경>의 '무소득(無所得)입니다. 화두행위는 바로 무소구(無所求) 무소득(無所得)행입니다. 더 이상 구할 것도 없고 더 이상 얻을 것도 없지요. 본래부처인데 뭘 더 구하고 얻겠어요? <금강경> 식으로 표현하면 무주상(無住相)이죠. 화두는 곧 무주상행(無住相行)을 생활화하는 것입니다. 무주상행이 생활화될 수 있도록 하는 실력을 길러내는 과정이 화두를 드는 것이죠. 

 

정리를 해보면, 화두는 무엇을 얻기 위해서 하는 것이 아니라 중도행, 부처행으로 실천되어지는 것입니다. 중도행, 부처행은 용광로와 같습니다. 그것을 정말로 간절하게 지극하게 투철하게 하기만 한다면 우리가 문제 삼고 있는 모든 것들이 다 녹아날 수 밖에 없습니다. 다 나가 떨어질 수 밖에 없습니다. 그럼 어떻게 되는가? 바로 그 순간, 우린 편안해지고 자유로워질 수 있습니다. 편안함과 자유로움이 일상적으로 생활화되어지고, 살아서도 생활화되어지고, 죽어서도 생활화되어지는 상태를 우리는 해탈과 열반이라고 표현하지 않습니까? 그걸 달리 표현하면 현실적인 행복이라고 표현하는 것과 궁극적인 행복이라고 표현하는 것. 그 두 가지가 다 들어가 있는 거죠. 여기서도 저기서도, 살아서도 죽어서도. 그걸 우리는 여러 가지 형태로 표현하고 있죠. 

 

오늘은 하안거 결제법회를 스님들만 모여서 한다고 하기에 제 나름대로 파악하고 정리한 간화선에 대한 말씀을 드렸습니다. 여기에는 아마 간화선을 하시는 분도 계실 것이고 다른 것을 하는 분도 계실텐데, 간화선이 됐든 위빠사나 됐든 이름은 별로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뜻한 바 내용들은 잘 천착하면 우리가 충분히 다 만나고 함께 하고, 또는 때와 장소에 따라서 적절하게 잘 활용하는 것이 우리 몫이겠구나, 이렇게 정의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는 말씀을 드리면서 이야기를 정리하겠습니다. 

 

어쨌든 여러 가지로 좀 부족하고 불편함이 많은 산중인데도 불구하고 백장선원, 실상사의 대중으로 안거를 함께 해준 스님들께 감사드립니다. 한 철 아무쪼록 편안하고 의미 있게, 본인에게 큰 이익이 될 수 있게, 그래서 그것이  산중에 큰 힘이 될 수 있도록 그렇게 한 철 잘 지내시기를 바라면서 제 얘기를 정리하겠습니다.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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