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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종의 전래와 구산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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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관리자 작성일05-08-10 12:12 조회6,094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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웅장하고도 섬세한 지리산의 품 속에는 헤아리기 힘들만큼 많은 사찰이 들어서 있다. 화엄, 천은, 쌍계, 실상, 대원, 단속, 법계, 영원, 벽송, 연곡사 등이 골짜기마다 터를 이루고 천 년 세월을 지켜오고 있다. 가히 한국 불교의 요람이라 할 만큼 그 도량들은 씩씩하고 엄숙하다. 그 중에서 실상사는 단일 사찰로는 가장 많은 문화재를 보유하고 있으며 신라말 구산선문(九山禪問) 가운데 최초의 선문이기도 하다.

선종의 전래와 구산선문

구산선문은 귀족과 왕실에 결탁하여 타락한 교종불교에 반기를 들고 9세기에 접어들면서 신진 지식인 들에 의해 수용된 선종불교의 상징적인 사찰들이다. 달마대사가 갈대잎을 타고 중국으로 건너온 이래 꽃피운 선법(禪法)을 신라의 젊은 스님들이 배워 와 둥지를 틀기 시작한 것이다.

그당시 선법이란 참신하고 개혁적인 신사조운동이었다. 인과율에 의한 기존의 교종불교는 사람의 운명이란 태어날 때부터 결정되어 있다는 운명론적 인식이었고 선종의 사상은 마음이 곧 부처이기 때문에 누구나 부처가 될 수 있다는 혁명적인 의식을 제공하였다.

장흥 보림사의 가지산문(도의), 남원 실상사의 실상산문(홍척), 곡성 태안사의 동리산문(혜철), 강릉 굴산사의 사굴산문(범일), 창원 봉림사의 봉림산문(현욱), 영월 흔법사의 사자산문(도윤), 문경 봉암사의 희양산문(지증), 보령 성주사의 성주산문(무염), 해주 광조사의 수미산문(이엄), 이른바 구산선문 사찰과 그 창시자들이다. 이들은 모두가 경주에서 멀리 떨어져 있는 지방에 근거를 두었는데 선종이 지방호족들의 후원을 받고 성립하였음을 말해주는 것이다. 당시에는 교종불교에 소외된 승려들 못지않게 지방호족들도 중앙정권으로부터 소외되어 불만이 많았었고 자연스럽게 이들이 결합하여 신라말 혼란기의 사회질서를 재편해 간 것이다.

구산선문 중 가장 도량을 개척하여 선풍을 떨친 곳이 남원 실상사이다. 개산조 홍척(洪陟)국사가 마조(馬祖)의 법통을 이은 서당(西堂)선사에게 깨우침을 얻어 돌아온 후 흥덕왕(828) 때 지리산에서 도량을 여니 수천 명의 대중이 운집하였다고 한다. 우리나라 선종의 역사에서 맨 처음 중국으로 건너가 선법을 배워온 이는 가지산문의 도의선사였다. 그는 홍척국사보다 먼저 서당선사에게 심인(心印)을 얻어 돌아왔지만 가지산문은 도의의 3대 법손 체증때 와서야 독립적인 산문이 형성되었고 그 첫 출사표를 던진 사람은 실상산문의 홍척국사였다.

실상사 사적지에는 이와 관련된 내용이 기록되어 있는데 "도의선사가 당나라에서 선법을 먼저 배워 왔지만 그때는 시운이 덜 익어 세상에 전파하지 못하였고 홍척국사가 돌아온 다음에야 비로소 파를 이루었으며 그와같은 사실이 최치원이 쓴 봉암사 지증국사비에 자세히 나와 있다."고 씌어 있다.

홍척의 문하에는 편운(片雲), 수철(秀澈) 등 뛰어난 제자들이 배출되었으며 그 중 수철국사가 법손이 되어 실상산문의 제2대 조사가 되었다. 이때가 실상사 역사에서 가장 번창했던 때로 약사전에 모셔진 철불이 만들어진 시기다.

이 불상은 수철국사가 4천 근이나 되는 철을 녹여 만들었다고 하는데 3m가량 되는 거불로 우리나라 철불 가운데 가장 큰 부처님이다.

신라 말 고려 초에는 철제농기구가 보급되어 철을 다루는 기술이 발달하였으며 호족들은 이를 토대로 경제력을 높이는 한편 무기를 제조하여 독자적인 행동을 감행하기도 하였다. 이러한 철제기술의 발달로 선종사찰에는 어김없이 철불들이 등장하게 된 것이다.

그리고 이 철불들은 전 시대에 볼 수 없었던 새로운 미감으로 고매한 불성의 소유자가 아니라 이제는 무엇이든 꿈꿀 수 있는 호족들의 야심이 담겨져 있다.

창건 이후 실상사는 670여 년간 번창한 세월을 누려왔으나 조선시대가 되자 급격히 쇠퇴하는 역사를 보이고 있다. 세조때에는 실상사와 적대적인 종파에 의해 방화되어 모든 가람이 불 타 200년 동안이나 농토로 경작되는 비운을 맞기도 했다. 이때 실상사의 선맥은 산내 암자인 백장암에 숨어 법통을 이어왔고 숙종 무렵 문중을 크게 일으킨 벽암(碧岩)대사와 침허(枕虛)대사에 의해 본절로 수복하게 되었다. 순조때 다시 사세가 기울고 승려가 흩어졌는데 의암(義岩)대사가 중수하였고 고종 무렵 다시 방화로 소실된 당우를 월송(月松)대사가 재건하여 오늘에 이른다는 것이다. 실상사는 초창기를 빼놓고 대부분 박해로부터 시달려온 도량이었으며 그 속에서도 눈물겹게 명맥을 유지해 온 셈이다.

현재는 보광전을 비롯하여 약사전, 명부전, 칠성각, 선방들이 아담하게 들어앉아 있는 조촐한 모습이지만 보광전터를 조사해 본 결과 정면 30m, 측면 18m의 거대한 건물지가 확인되었다. 홍척국사가 불사를 일으킬 당시에는 선종사찰 중에서 가장 큰 규모의 건축이었으니 지금의 보광전은 그 위에 섬처럼 떠 있는 건물인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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